김세동 사회부 부장

임기가 보장된 환경부 산하기관의 대표나 상임감사 등의 사퇴를 강요하다 거부하면 표적 감사를 해 강제로 쫓아내고 그 자리에 청와대가 낙점한 인사를 불법 채용한 혐의를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의 기각은 법원이 처한 근본적인 문제를 상징한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행정권 남용이 검찰 손에 넘겨 사법적 단죄를 받게 할 정도는 아니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법원 내 특정 조직과 김명수 대법원장이 손잡고 밀어붙인 검찰수사 8개월과 재판 2개월여가 지나면서 청와대·여당, 검찰의 법원 압박과는 별개의 새로운 근원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바로 법원의 정치화, 정치판사의 등장이다. 박정길 서울동부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3월 26일 전 환경부 장관 구속을 기각하며 든 사유는 노골적인 정치적 선언이다. ‘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정도로 간단하게 적어도 됐을 텐데 박 판사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5∼9배나 긴 462자로 장황하게 문재인 정부의 공공기관장 찍어내기와 낙하산 인사 심기에 면죄부를 주는 판단을 내렸다. 영장판사가 기소 뒤 이뤄질 본안재판의 무죄까지 미리 선고한 격이다.

우선, 박 판사는 “일괄사직서 청구 및 표적 감사 관련 혐의는 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과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인해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 및 감찰권이 적절하게 행사되지 못하여 방만한 운영과 기강 해이가 문제 되었던 사정, 새로 조직된 정부가 해당 공공기관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인사수요파악 등을 목적으로 사직의사를 확인하였다고 볼 여지도 있다”고 밝혔다. 판사가, 개명한 최서원이 아니라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부터 의도가 읽히는데, 특히 ‘최순실 일파’라는 용어는 매우 정치적으로 들린다. 전 정권 임명 인사는 최순실의 손을 탄 것 아니냐는 암시와 함께, 새 정부가 이들을 쫓아내는 것을 ‘정상화 과정’으로 방어해주고 싶었던 듯하다. 이어 박 판사는 “공공기관의 장이나 임원들의 임명에 관한 관련 법령의 해당 규정과는 달리 그들에 대한 최종 임명권, 제청권을 가진 대통령 또는 관련 부처의 장을 보좌하기 위해 청와대와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임원추천위원회 단계에서 후보자를 협의하거나 내정하던 관행이 법령 제정 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있었던 것으로 보여 피의자에게 위법성 인식이 다소 희박해 보이는 사정이 있다”고 말했다. 불법도 관행이라 괜찮고 대통령의 인사권은 법령 위에 있다는 것인데, 청와대 대변인이라면 모를까 도무지 판사답지 않은 인식이다. 표적 감사로 쫓아낸 자리에 청와대가 점찍은 사람을 앉히기 위해 그에게만 면접자료와 질문지를 줘 애먼 사람들을 들러리로 세운 건 채용 사기나 다름없다.

판사가 법률적 양심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정치적 소신으로 판결하기 시작하면 법치주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를 없애고 법원장 임명에 판사회의의 의견을 반영하기로 한 것 등은 판사들에게 묵묵히 재판업무에 집중하기보다 조직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정권의 의중에 눈맞추며 여론에 편승하는 판결을 내리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법원이 진짜 위기를 맞았다.

sdgim@
김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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