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작 ‘부도덕한 이야기’
어릴 적 과자선물세트를 받으면 뜯지도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모셔두다가 두근거림이 좀 가라앉아야 간신히 뜯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싸여 있던 선물세트는 과자 한 개가 주는 쾌감을 몇 배 응축해 놓은 듯한 압도적인 즐거움의 표상이었다. 발레리안 보로브치크 감독의 1974년 작 ‘부도덕한 이야기’(사진)는 과자선물세트의 영상 버전과도 같은 영화다.
폴란드 출신 보로브치크 감독은 프랑스로 이주해 프렌치 뉴웨이브의 기수 중 한 명인 크리스 마커와 공동작업을 하며 주로 초현실주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재능을 인정받았다. 비평가들은 프란츠 카프카와 루이스 부뉴엘을 교배시키면 보로브치크가 나올 것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보로브치크 감독은 1970년대 들어 포르노그래피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1971년 ‘블랑슈’로 시작한 그의 포르노그래피적 도전은 ‘부도덕한 이야기’를 거쳐 음란성 문제로 영국에서 상영금지 조치를 당한 ‘야수’(1975) 에 이르러 정점에 올랐다가 서서히 내리막을 걷게 된다.
이 중 ‘부도덕한 이야기’는 뛰어난 미장센과 독특한 주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4개의 ‘부도덕한’ 에피소드는 근친, 탐욕 등의 성적 터부를 키워드로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부모가 여행을 가고 홀로 남겨진 한 소녀와 그의 사촌 안드레(파브리스 루치니)의 이야기를 그렸다. 안드레는 자신이 도시의 유곽에서 창녀들과 겪은 무용담을 동생에게 들려주고 경험이 없는 사촌 동생은 오빠의 이야기에서 성적 판타지를 느낀다.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의 후반에서는 파도의 이미지와 소년, 소녀가 경험하는 클라이맥스가 중첩되며 음란한 피사체가 담긴 풍경화를 보는 듯한 강렬함을 남긴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백작부인(팔로마 피카소)의 기행을 그린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부를 이용해 가난한 동네 처녀들을 유혹해 한데 모아 살해하고 그들의 피를 마신다. 젊은 피가 그를 늙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피를 빨아먹고 권력을 유지한다는 다소 진부하지만 나름의 직설적인 계급적 비판이 담긴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특히 불운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친딸인 팔로마 피카소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교황과 그의 딸을 중심으로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를 그렸다. 교황은 성불능 판정을 받은 사위를 고쳐주겠다는 명목으로 갖가지 음란한 그림들을 수집해 사위에게 보내지만 그는 교황의 기행을 참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교황의 딸은 남편이 떠난 후 아이를 갖기 위해 사제와 관계를 갖는다. 성스러운 제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탐욕과 성적 타락의 온상이 된다. 교황 부녀의 부패를 비판하던 한 사제는 화형에 처해진다. 결국 딸은 아이를 낳고 교황과 사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의 세례식이 치러지며 에피소드는 끝이 난다. 성배나 제단 같은 종교적 상징들이 부패한 인간들의 성행위와 같이 재현된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앞선 에피소드에서 계급과 억압에 대한 비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또한 종교사회의 비판을 위한 감독의 극단적 풍자로 고려할 만한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기가 쉽지 않다. 에로티시즘의 수위로도 그렇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문제의식과 사회비판이 전례 없는 방식과 태도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괴상한 통속물 정도로 영화를 단죄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미덕이 많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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