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400년 계급사 / 낸시 아이젠버그 지음, 강혜정 옮김 / 살림
식민 개척 초기 1500년대부터
조롱하고 멸시… 계급적 차별
느림보·촌뜨기로 멍에 덧씌워
게으르고 무능한 ‘쓰레기’ 낙인
지금도 상속재산으로 지위 결정
세계 최강국의 위선·모순 ‘충격’
하지만 책은 이 같은 신화적 건국사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뒤집고 있다. 저자인 낸시 아이젠버그 루이지애나대 석좌교수는 미국은 식민지 초기부터 착취와 배제의 논리에 의해 기획됐으며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지난 400년간 끊임없이 조롱받고 소외돼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동안 흑인과 소수인종에 주목해온 진보적 역사서술과는 달리, 미국사의 근간을 이루면서도 주류사회에 의해 철저히 무시돼온 ‘가난한 백인’에 초점을 맞춘다.
가난한 백인은 미국 식민지 개척사에서 신흥 상류층이나 중산층과 다른 ‘별종’ 취급을 받았다. 정치 공작에 따라 게으르고 지저분하며 무능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우생학이 대두된 19세기엔 심지어 추방과 단종(斷種)의 대상이 됐다. 이들이 가난한 까닭은 계급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열등한 혈통 탓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백인 쓰레기(White Trash), 폐기물 인간(Waste People), 레드넥(Redneck), 느림보, 힐빌리(Hillbilly·시골사람), 습지 인간 등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별적 별명이 이들에게 멍에처럼 덧씌워졌다.
저자에 따르면 백인 쓰레기는 미국 남부 노예제도의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영화 ‘앵무새 죽이기’(1962)의 구제불능 백인처럼 미국 역사에 잠깐 등장하고 사라진 단역이 아니다. 사실 그들의 역사는 흔히 알고 있는 1900년대가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 초기인 1500년대에 이미 시작됐다.
영국 본토의 식민주의자들에게 신대륙은 자국 내 빈곤을 줄이고, 나태하고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추방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로서 기회의 땅이었다. 신대륙은 사회의 온갖 찌꺼기 같은 잉여 인구를 흘려보낼 ‘하수구’이자 ‘쓰레기 더미’였다.
저자는 미국 엘리트 지식인들도 계급 차별과 권력 쟁탈전으로 얼룩진 역사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독립의 영웅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주 오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찌꺼기’라고 부르며 잡초 솎아내듯 제거하기를 소망했다. 3대 대통령 제퍼슨은 투표권을 토지보유권자에만 제한함으로써 토지 소유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 끔찍한 차별을 야기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남부 촌뜨기 이미지를 장점으로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미지를 차용했고, 결국 남부 노동자 계급의 호응을 얻어 조지 W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계급 갈등은 갈수록 첨예화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또 사회 계층 이동은 어려워지고 불평등의 힘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저자는 “상속자, 가계도, 핏줄 등 부를 가진 유사 귀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힘을 확고하게 할 방법을 찾는다. 지금도 우리는 실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상속재산에 따라 지위를 얻는 모습을 본다”며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재평가함으로써 미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해 너무나 자주 무시됐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토지와 재산, 계급 사다리와 양극화, 상위 1%와 나머지 99% 사이의 갈등 등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기나긴 착취와 투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위선과 모순에 대한 고발이 너무 적나라해서 충격적일 정도다. 기회균등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사회가 자체 내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소외된 사람들의 존재를 솔직하게 수면 위로 불러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똑같은 문제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752쪽, 3만8000원.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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