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안나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유럽연합(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한다’는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의 협약 조항을 언급하면서, 한국이 조속히 행동을 취해야 할 상황이라며 조속한 시일 내에 가시적인 조치가 없으면 절차에 따른 제재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논의에서도 지지부진함에 따라 노사정 합의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향후 국회에서의 논의 등을 통해 정부의 최종 입장이 정해질 것이다.
교역 당사국 간 근로 조건의 차이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주요인이라는 인식 아래 각국의 근로조건을 동일화하려는 시도(사회적 조항)는 19세기 후반부터 있었으며, ILO 국제노동 기준은 이를 구체화한 것이다. ILO 설립 준비 단계에서 영국 등 일부 국가는 국제 노동 기준을 위반하는 국가에는 불이익을 주자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회적 조항의 강제는 보호무역의 가장(假裝)된 얼굴이며 국가 경쟁력 우위를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근간이 된 우루과이라운드(UR) 최종 협정문에도 사회적 조항을 포함시키자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세계 경제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고용 창출이 부진했던 EU는 1990년대 초부터 사회적 조항을 본격 거론하기 시작했다.
한·EU FTA 협정문에 사회적 조항이 포함된 것은 우리나라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경쟁력이 떨어질 소지가 있다는 EU의 인식과 국내의 어수선한 노동 현실이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합리적인 상황으로 정리될 수 있다는 우리 정부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법부의 법외노조 처분을 대통령이 직권으로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고, 폭력시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노조 관계자가 경찰서 앞에서 인증 샷을 찍는 우리의 노동 상황을 고려하면 준비가 안 된 ILO 핵심 협약의 비준은 국가 경쟁력을 상당히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경제포럼(WEF) 국가 경쟁력 평가의 노사 협력 부분이 바닥권인 현실에서 최악의 경우 EU와의 통상 마찰을 감수한다는 기조에서 국내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진행해야 한다. 몇십조 원의 일자리 예산을 투입하고도 외환위기 극복 이후 최악의 고용참사를 불러온 최저임금 인상의 과속과 같은 정책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노조의 사업장 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파업 시 대체근로 인정, 부당 노동행위 폐지 등 경영계 요구 사항을 해고자·실업자의 노조 활동 보장, 공무원 노조 가입 확대 등 노동계 요구 사항과 함께 고려해 시간을 가지고 균형 있게 노사정 합의를 진행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산업별 노조인 유럽에서는 대통령이나 총리도 노조원이고 외교부 대사의 임금 및 근로조건도 단체교섭으로 결정되는 등 우리나라와 사정이 아주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끝으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 우리나라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아서 ‘노동인권 후진국’이라는 일각의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미국이 핵심협약 8개 중 2개만을 비준한 것에서 나타나듯이 ILO 핵심협약 비준은 회원국의 의무사항이 아니다. 10% 초반의 조직률을 가지고 경제·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선진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노조들이 벤치마킹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노동권이 보장되고 있다는 게 국제사회의 대체적인 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