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윤덕 작가의 첫 그림책 ‘만희네 집’은 1995년에 나왔고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해서 ‘시리동동 거미동동’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를 읽고 자라난 어린이들은 이미 어른이 됐다. 생활 세계 구석구석을 산뜻하고 아름답게 비추는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은 세계 곳곳에 수출돼 환영받았다. 이 작가의 작업에서 새로운 기점으로 보이는 작품은 2010년에 나온 ‘꽃 할머니’다. 한·중·일 평화그림책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책을 만들면서 겪은 어려움은 ‘그리고 싶은 것’이라는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됐고 한 권의 그림책이 흔들리는 역사를 지탱하고 바로 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을 독자에게 증명했다. 이후 권윤덕 작가는 은폐되거나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고 생존자의 삶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담긴 ‘피카이아’, 4·3 제주 항쟁을 다룬 ‘나무 도장’에 이어서 5·18 그림책 ‘씩스틴’이 출간됐다.
많은 사람에게 군복의 무늬는 든든한 국가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무늬가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계엄의 공포다. 작가는 그 공포가 화창한 봄날을 엄습했던 1980년 광주를 그린다. 한 장면도 지나치게 격렬하지 않아서, 군홧발 소리처럼 무심하게 침착해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림책을 뒤덮은 총과 군화보다 광주 거리 곳곳에 핀 오월의 장미와, 떠난 이들과 함께 그려진 찔레꽃이 고와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로를 지키는 시민들의 눈은 희망으로 반짝인다. 작가는 광주시민들이 푸른 하늘로 올린 씨앗망울들이 이 험악한 세상을 어떻게 ‘서로 만져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는지를 상상력 가득한 엄격한 그림으로 재현해낸다. 상상력 가득한 엄격함이라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책에서는 이뤄냈다.
권윤덕 작가는 가장 앞에 있으면서도 결코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작가다. 이번 그림책에서 또 우리는 그의 나아간 모습을 본다. 난폭한 얼룩무늬의 씩스틴은 시민들의 손에서 푸른 희망의 전사가 됐다. 만희가 사랑한 골목이, 아이가 고양이와 기어 다녔던 햇살 아래 창가가 5월의 광주에 있었다는 것을 이처럼 포근하고도 장엄하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권윤덕 작가밖에는 없을 것이다.
김지은 서울예대문예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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