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체의 증거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섹스와 스릴러를 병합한 이른바 에로틱 스릴러가 우후죽순 제작됐다. ‘보디히트’(1981), ‘박싱 헬레나’(1993)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샤론 스톤의 열병을 퍼뜨린 ‘원초적 본능’(1992), ‘슬리버’(1993) 등이다. 에로틱 스릴러의 성행은 1980년대 들어 성장하기 시작한 비디오시장의 영향을 받은 현상이기도 하다. 스릴러를 표방하고는 있으나 여성캐릭터, 즉 팜파탈을 통한 성 재현을 영화의 주요 관전 포인트로 삼았다. 이 범주에 속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성욕이 넘치는 팜파탈과 그의 수많은 ‘먹잇감’을 통해 반복되는 섹스신과 그로 인해 신세를 망친(?) 남자주인공의 말로를 보여주며 비슷한 스토리를 반복했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섹스 치정극이지만 늘 화려한 캐스팅을 선보였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스타로 보여주며 승부를 보고자 한 셈이다. 울리히 에델 감독의 1993년작 ‘육체의 증거’(사진) 역시 앞서 개봉한 에로틱 스릴러의 기본 플롯을 바탕으로 마돈나라는 대스타를 전면에 내세우고 윌럼 더포를 포함한 화려한 라인업으로 포장한 영화다. 개봉 당시 평론가들은 마돈나의 형편없는 연기를 혹평했지만 영화는 이들의 평가보다 마돈나의 누드로 더 큰 화제를 모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젊고 아름다운 레베카(마돈나)의 늙은 애인 앤드루가 그와의 격정적인 섹스 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경찰은 앤드루의 부검과정에서 발견된 코카인과 심장질환 병력, 그리고 그가 레베카에게 800만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는 정황을 바탕으로 레베카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레베카가 돈을 위해 심장이 약한 앤드루에게 약을 먹이고 성관계를 하게끔 유도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레베카는 결백을 주장하고 유능한 변호사 프랭크(윌럼 더포)를 고용해 재판에 맞선다. 레베카에게 고용되긴 했지만 프랭크 역시 그의 무죄를 믿기 힘들다. 예순이 넘은 노인과 살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데다가 경찰 앞에서 앤드루와 나누었던 가학적 성행위에 대해 당당하고도 자세히 서술하는 레베카가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배심원을 포함한 재판장의 모든 이들이 레베카를 범인으로 확신하는 듯하지만 물증이 없어 검사 측은 난항을 겪는다. 영화의 제목처럼 레베카의 치명적인 ‘몸’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인 셈이다. 의뢰인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하려는 프랭크의 몸부림은 레베카를 바라볼 때마다 차츰 무너진다. 레베카는 자신을 가지려 몸이 단 프랭크를 유혹해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인다.

프랭크는 레베카가 서술했던 난잡한 성행위의 새로운 상대가 된다. 알몸으로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철저히 레베카의 지배 아래 황홀경을 경험한 프랭크는 이 새로운 방식에 완전히 중독되며 레베카에게 빠져든다. 레베카는 자신의 침대가 아닌 엘리베이터와 주차장 등에서 프랭크와 섹스를 감행하며 그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한다. 한편 재판이 생각보다 어렵게 진행되자 레베카는 직접 증인석에 서겠다고 프랭크에게 요구한다. 증인석에서 레베카는 앤드루의 변태적 성적 취향과 함께 그에게 남자 애인이 있었다고 폭로하며 눈물을 흘린다. 레베카의 놀라운 증언으로 프랭크는 배심원의 동정을 사는 데 성공하고 결국 그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다.

팜파탈이 등장하는 다른 무수한 에로틱 스릴러의 결말을 떠올려도 그렇지만, 영화가 이쯤 되었을 때 대부분의 관객은 분명 여자의 음모가 밝혀지는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이 영화 역시 관습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는 반전을 드러낸다. 프랭크는 무죄판결을 받자마자 태도가 돌변한 레베카를 추적하고, 그가 앤드루의 유산을 위해 주치의 페일리와 모의해 심장마비로 죽게 했다는 것을 밝혀낸다. 분노한 프랭크가 응징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돈을 독차지하고자 페일리를 버리려고 했던 레베카에게 페일리가 총을 난사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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