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시 송산면 삼월리
스무살 넘도록 살았던 옛집
지금은 뜯겨 황량한 땅으로
독립운동에 옥살이한 아버지
어머니 홀로 아들 키워내시고
할아버지는 천자문 가르쳐줘
광복·분단·전쟁 소용돌이속
시대의 아픔이 곧 내 가족사
울컥 솟구친 감정 글로 표현
이 땅에 닥쳐온 지난 한 시대는 봄볕 한 낱도 깃들지 않는 어둡고 긴 눈바람의 계절이었다. 그 엄혹한 항일기(抗日期), 저 일제가 패망하기 여섯 해 전인 1939년, 아시아를 통째로 삼키려고 단말마로 날뛰던 때, 나는 동토에 떨어지는 한 톨 풀씨로 첫울음을 터뜨렸다. 충남 당진시 송산면 삼월리 209번지, 할아버지 댁에 이름을 올리고 나는 스무 살 넘도록 살았고 오늘토록 나는 이 본적에 묶여 있다. 할아버지 댁은 먼 삼국시대 중국으로 건너다니던 나루터로 이름이 붙여진, 당진읍내에서도 25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5리 밖에는 바다였어도 어촌은 아니고 논밭을 일구며 사는 마을이었다. 할아버지 댁은 북향이었는데 대문만 나서면 바로 우리 고을의 진산인 봉화산이 이마에 닿아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꽃으로 분홍빛이던 그 산을 나는 자주 오르내렸는데 봉우리에 올라서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나의 글방이기도 한 할아버지의 사랑방은 먼데서 낯선 손님이 자주 찾아오셨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 삼팔선, 금강산, 김구, 이승만, 김일성, 여운형 그런 낱말들을 뜻 모르고 듣기도 했다.
국민학교 3학년 추수가 끝난 늦가을 봉화산에서는 밤새도록 횃불이 오르고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총을 멘 순사들이 흰옷 입은 마을사람들을 묶어서 끌고 가고 아낙네들이 울며 따르는 것이었다. 지금 돌아봐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산마을에서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일으킨 폭동이었던가, 궁금증이 풀리지 않고 갈라파고스처럼 갇힌 그 땅에서 나는 꿈의 껍질 벗는 한 마리 이구아나였다. 지금 나는 내게 시의 씨앗을 물어다 준 저 해방공간의 땅에 와서 밭고랑을 헤집어 본다.
마을 안에서는 한눈에 띄던 옛집은 재목으로 팔려 뜯겨나가고 소나무, 밤나무가 숲을 이루던 뒷동산도 헐리고 여름날 어머니가 김을 매던 너른 텃밭도 몇 고랑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한 뼘 땅에서 내 글쓰기의 씨앗이 싹트고 가녀린 잎새와 몇 망울의 꽃들을 터뜨리게 되었으니 내 한 생애의 시작이며 끝을 여기서 찾을밖에 없다.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졸시 ‘냉이꽃’ 첫머리다. 1975년 ‘문학과 지성’ 봄호에 발표된 이 시를 ‘문학사상’ 5월호 월평에서 오탁번 시인은 “잘 썼다. 참 잘 썼다. 나는 이 시를 열 번도 더 읽었다. 다시 평을 할 수 없으므로 옮겨 적는다”고 세상에는 없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 후 여러 사람의 눈에 띄어 오늘의 대표시인 264명이 뽑은 ‘한국애송명시’에 오르기도 했다.
글자도 안 되고 글도 서지 못하는 나였기에 뜻밖의 대접에 짐짓 손을 내저었더니 “아니지. 화자의 한 생애가 통째로 들어 있잖아, 어머니의 땀방울이 키운 것은 냉이꽃이면서 눈물로 길러낸 외동아들이기도 하지. 그 배경에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가 있고.” 내 또래 시인의 풀이를 듣고 보니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스물두 살 젊은 나이로 나라의 독립과 겨레의 자존을 세우려 동지들을 모아 농민조합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3년에는 보안법으로 공주형무소에서 1년, 1935년에는 치안유지법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의 감옥살이를 했다. 1935년 9월 19일자 매일신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각 일간지에 박스기사로 실렸고 한국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 연표에도 올라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에 드나들던 아버지와/ 스승 면암(勉庵)의 뒤를 이어/ 조선 유림을 이끌던 장후재(張厚載)학사의/ 셋째 딸로 시집와서/ 지아비 옥바라지에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겨우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졸시 ‘자화상’에서)
광복,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아비 없는 홀어미의 외동아들로 철없이 나이가 들었고 겨우 글자를 익히고 무엇인가 써보려고 붓을 들면 그만 울컥 솟구쳐오는 것들이 먼저 머리나 가슴을 파고든다. 굳이 나만의 것도 아닌, 뉘를 탓할 일도 아닌 이 땅의 한 시대가 이룬 높은 산맥이며 깊은 대하는 곧 나의 가족사이면서 한 핏줄 겨레의 아픈 나눔의 역사와 그로부터 일어나는 시대적 명제들이었다.
“서투른 병정은 가늠하고 있다/ 목탄으로 그린 태양의/ 검은 크레파스의, 꽃밭의, 지도의/ 눈이 내리는 저녁 어귀에서/ 병정은 싸늘한 시간 위에 서 있다/ 지금은 몇 도 선상인가/ 그리고 무수히 탄우(彈雨)가 내리던/ 그 달빛의 고지는 몇 도 부근이던가/ 가슴에는 뜨거운 포도주/ 한줄기 눈물로 새김하는 자유의/ 피비린 향수(鄕愁)에 찢긴 모자/ 이슬이 맺히는 풀잎마다의 이유와/ 마냥 어둠의 표적을 노리는/ 병정의 가슴에 흐르는 빙하/ 그것은 얼어붙은 눈동자와/ 시방 날개를 잃는 벽이었던가/ 꽃이었던가”(‘북위선’ 1)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북위선’ 3부 중 1부다. 참으로 분에 넘치는 심사평을 받았고 김종길 선생은 따로 ‘북위선의 사이즈’라는 글을 신문에 싣기도 했으며 ‘신춘의 꽃과 시’라는 사설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 시에서 “목탄으로 그린 태양의/ 검은 크레파스의, 꽃밭의, 지도의”는 저 휴전선을 두고 서로 총을 겨누는 형제들과 4·19혁명에 이어 5·16을 만나는 현실의 그림이었다. ‘북위선’이 몰고 온 뜻밖의 울림에 나의 응모벽도 마감이 되는가 했더니 뒤이어 문공부 신인예술상에 ‘노래여 노래여’가 문학부 특상을 받게 되어 나도 모르게 머리에 뿔이 나고 있었다.
“푸른 강변에서/ 피 묻은 전설의 가슴을 씻는/ 내 가난한 모국어/ 꽃은 밤을 밝히는 지등처럼/ 어두운 산하에 피고 있지만/ 이카로스의 날개 치는/ 눈 먼 조국의 새여/ 너의 울고 돌아가는 신화의 길목에/ 핏금진 벽은 서고/ 먼 산정의 바람기에 묻어서/ 늙은 사공의 노을이 흐른다/ 이름하여 사랑이더라도/ 결코 나뉘일 수 없는 가슴에/ 무어라 피 묻은 전설을 새겨두고/ 밤이면 문풍지처럼 우는 것일까”(‘노래여 노래여’ 1)
쉰다섯 해 저쪽,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모두 벽이었고 나를 바람 모진 빈 들녘에 던져놓은 것은 알지 못할 시대적 거센 물결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둠의 벽에 머리를 찧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못하는 물음을 쏟고 싶었을 것이다. 무슨 자의식이나 책 읽기에서 얻어지는 깨우침이기보다는 내 머리나 가슴을 조여 오는 단단한 밧줄을 끊고 싶은 관능의 몸짓이었을 것이다.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고 폴 발레리가 말했던가. ‘노래여 노래여’의 첫 줄인 “푸른 강변에서/ 피 묻은 전설의 가슴을 씻는/ 내 가난한 모국어”가 튀어나온 것은 어린 날부터 내 안에서 움터온 ‘모국어’에 대한 아픈 사랑이 터뜨린 외마디 소리였다.
누가 나에게 이 땅에 태어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인류가 가진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우주 만물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어머니 나라의 말씀이요. 그 말씀 하나하나 써낼 수 있는 내 나라의 글자 한글을 지고 태어난 것이라고. 오랜 역사와 더불어 아니 지난 한 세기에는 더더욱 상처받고 피 흘리기도 했으나 그 담금질 때문이었던가, 오히려 오늘의 해와 달의 광채를 뿌리고 있지 않는가.
스물 몇 살 적 나를 옭아매던 내 어머니로부터 옮아오는 자아이면서 타자의 것이기도 한 분단 현실의 글감에서 벗어나 오랜 역사, 문화 쪽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서른 살을 훌쩍 넘어서였다. 감옥을 드나드는 아비 탓에 할아버지는 똥오줌 못 가리는 나를 데려다 당신의 품에 재우며 천자문을 읽히셨다. 사랑방 문갑 위에 놓인 남포석벼루며 조선백자산수문연적을 보며 자랐고 거기 몽당붓으로 글씨도 익혔다.
나이가 들어 인사동을 기웃거리다가 우리나라 옛 벼루에 그만 홀려서 반세기토록 벼루 수집에 넋을 뺏기고 있다. 벼루뿐만이 아니라 옛사람의 글씨며 청자, 백자, 민화에도 한눈을 팔게 된 것은 그것은 무슨 값이 나가는 골동품이 아니라 바로 우리네 먼 조상부터의 삶이요, 얼이요, 인류 앞에 내놓은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기서 얻어지는 글감이 있어 오늘 내가 붓을 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붓을 잡을 줄도 모르면서/ 글자의 속뜻을 헤아릴 줄도 모르면서/ 사랑 하나 읽을 줄도 모르면서/ 돌을 알아보는 이들이/ 붓을 잡을 줄 아는 이들이/ 글자의 뜻을 아는 이들이/ 사랑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이/ 생각을 갈고 사랑을 갈아 돌을 패이게 하던/ 그런 벼루 하나쯤 만나 보겠다고 찾아나선 것이/ 스무 해 넘게 허둥대고 있다”
벼루읽기 연작시 ‘사랑 앞에서는 돌도 운다’의 한 구절이거니와 옛 선비들은 “붓으로 밭을 간다(以筆爲耕)” 했고 벼루의 다른 이름인 연전(硯田)은 시인을 이르는 뜻도 있고 보면 조선시대 16세기 압록강 변인 평안북도 위원(渭原)에서 나오는 화초석(花草石)으로 깎은 벼루의 조각은 신의 솜씨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명품이다. 저 석굴암 대불을 빚은 손이나 솔거, 담징 또는 고려청자를 빚은 그 한국인의 예술의 정화(精華)가 중국의 것을 넘어서는 극치를 이루고 있다.
마치 우주를 담은 듯한 내 나라의 벼루를 물려주어 내게 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신 할아버지의 나라, 어머니의 말씀에 내 무딘 붓으로 어찌 다다를 수 있으랴. 한 틀의 벼루도 바닥을 낼 수는 없지만 남은 날들 모국어의 한 글자라도 바로 서는 시 한 편을 좇아서 먹을 갈고 붓을 다듬어 글밭 갈이를 해나갈 따름이다.
시인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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