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반도의 맛을 찾아서 - 1
나는 편식주의자다. 어릴 때부터 편식이 심해 어머니께서 고생 많이 하셨다. 지금은 없어 못 먹는 음식도 예전에는 비위가 약하다는 이유로 향도 맡지 못했던 음식이 많았다. 하지만 예민한 후각 덕분에 와인을 배울 때, 커피를 배울 때, 전통주를 배울 때, 혼자만의 즐거움이 많았다. 이제는 음식뿐 아니라 생활 속의 다양한 악취도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살면서 나 같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지금은 내 주변은 둘째간다면 서러워할 미식가들로 가득 차 있다. 나의 편식이 곧 미식의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음식을 따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세상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자임을 알게 됐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말이다. 그게 지금 독자들과 함께 미식 여행을 출발하는 이유다.

너무나 짧았던 봄은 작별 인사도 못 한 채 저 멀리 떠나보냈다. 찬 음료를 찾기 시작한 지 오래됐고 식재료와 음식을 찾아 바닷가 포구며 전통시장 등을 둘러보고 지쳐 돌아오는 날이면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해진다. 내겐 이미 여름이 왔다. ‘여름 바다’를 생각하며 봄부터 에어로빅과 수영을 시작했던 이른바 ‘리즈’ 시절은 이미 막을 내렸고 이제는 여름이면 뭘 먹어야 하는지, 어디서 여름의 맛을 느낄 수 있을지가 가장 고민되고 중요한 일이 됐다.
나는 산보다 바다가 좋다. 내 시야를 가장 멀리 둘 수 있는 곳이 바다라고 믿는다. 여름을 앞두고 바다가 궁금해질 때 달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 내 이름과 똑같은 지명을 가진 충남 ‘태안’이다. 시원하고 쭉 뻗은 동해안의 바다도 멋지지만 바다를 달리다 어느덧 나타나는 산자락, 그 산자락을 지나 들판을 달리다가 어느덧 다시 바다가 나오는 서해안 바다의 매력을 안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도시에 익숙한 나의 태안반도 방황기는 2014년부터 시작됐다. 태안에 친구가 있었다. 지인이 운영하는 펜션도 안면도에 있어 묵기 좋았다. 방문이 잦아질 무렵 뜻하지 않은 친구와의 갈등으로 실망과 상처가 컸었다. 그래도 태안이 좋아서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이내 실망과 상처는 잔잔해졌고 수평선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는 더 크고 넓어졌다.
# 한국의 투스카니… 태안반도
태안반도는 산과 바다, 들판이 한곳에 모여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식자재의 곡창지대로 ‘한국의 투스카니’라 할 만하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한국과 이탈리아는 비슷하다. 반도 국가이면서 위도도 비슷해서 이탈리아 최고의 곡창지대인 투스카니 지역을 쭉 당겨 한반도 옆으로 가지고 와보면 태안반도의 위치가 투스카니와 비슷하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간척지 쌀이 유명할 뿐만 아니라 국내 최대 생강 산지이며 육쪽마늘과 호박고구마, 고추와 방풍나물, 그리고 서해안의 신선한 해산물과 소금의 생산지인 태안반도는 요리사나 식자재 전문가들에게 끝없는 영감과 자극을 주고 있다. 또한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서해안 갯벌은 갯벌 하나만으로도 관광객들을 불러모은다.
언제부턴가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것에 중압감이 생겼다. 시력이 좋지 않은 탓도 있으리라. 운전하며 뭔가 반응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 이전만큼 장거리 운전이 신나지 않는다. 현지에서 차를 빌릴 방법만 용이하다면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 정말 좋은데,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하다 선택한 게 ‘함께 사용하는 자동차’다. 이른바 ‘카셰어링’이다. 세상은 날로 편해진다.

# 제철 감태의 보드라운 맛
하늘은 푸르고 미세먼지 전혀 없이 청명했던 4월의 봄날, 점심 직전에 서산 동부시장에 도착했다. 사람들도 오랜만에 청명한 날씨가 기쁘고 반가웠던 것 같다. 모두 미소가 가득했다. 사람들도 적당히 북적북적, 장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행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해산물 시장 특유의 바다 내음 가득한 바람이 콧잔등을 스쳤고, 시장에 가득한 생선구이 냄새로 엔도르핀이 마구 상승하고 있었다.
시장 입구로 들어서자 바로 태안의 특산물인 김과 감태 파는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이것 좀 먹어봐”. 들기름 잔잔히 발라 살짝 구운 감태다. 감태는 김처럼 생겼으나 맑고 선명한 초록색 혹은 연두색에 가까운 해조류다. 천연 갯벌에서만 나는 이 지역 특산물이다. 김처럼 즐기지만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인 맛과 향을 지녀 섬세한 고급요리 재료에 많이 쓰인다. 고기를 구워 싸 먹어도 별미고 라면 끓여 먹을 때도 크게 하나 잘라 넣으면 좋다. 소화 안 될 때 죽을 쒀서 감태 한 장 크게 풀어 넣으면 바다 내음이 진하게 난다.
서산 동부시장에는 ‘감태’로 유일하게 서산에서 명인으로 지정된 송철수 명인의 가게도 있다. 송철수 명인은 30년 넘는 세월을 갯벌에서 일일이 손으로 감태를 채취해내며 오늘날 최고급 감태 브랜드 ‘바다숲’을 키워낸 장본인이다.
다음은 송철수 명인이 설명하는 감태 고르는 법. “1월 초부터 3월 초까지 생산된 것이 가장 품질이 좋습니다. 특히 가로림 만에서 생산된 것을 으뜸으로 치는데 맛과 향도 짙고 입에 넣었을 때 촉감이 좋습니다. 너무 연둣빛이 강해 누런 느낌인 것보다 선명한 초록빛이 감도는 것이 좋습니다.”

# 우럭젓국보다 우럭 포
해산물 거리로 진입했다. 들어서자마자 캐나다에서 왔다는 관광객이 사진을 찍을 기세였지만 주춤했다. 내가 먼저 물어봐 줬다.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웃으며 화답한다. “그래유∼ 우리 시장 잘 나오게 찍어 주고 외국에 홍보 좀 많이 해 주세유∼” 충청도 특유의 여유와 호의적인 반응에 금세 힘을 얻어 캐나다 여행객은 마구 카메라 버튼을 눌러댔다.
체격 좋은 파마머리 여사장님이 운영하는 생선 가게는 목이 좋아서 그런지 크고 다양한 생선들과 해산물이 많이 진열돼 있다. 살이 오른 새우, 광어, 우럭, 곰치, 주꾸미, 바지락, 키조개가 바다에서 바로 건져낸 듯 싱싱했다. “요즘 뭐가 제철이지요?” “주꾸미지. 샤부샤부해서 먹으면 딱 좋아.” 시장에서 존대는 바라지 말자. 그만큼 경험했으면 이제 둔해질 법도 한데, 되돌아오는 반말에 욱할 때가 간혹 있다. 이날만큼은 상인의 반말이 친근했지만 말이다.
옆집 태안상회에는 배를 갈라 말려놓은 생선이 가지런하다. “아주머니 이게 뭐예요?” “서울에서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거여유.” 이곳에서 최고로 치는 ‘우럭포’였다. 그 옆에서 꾸덕꾸덕 말라가는 서대는 구이나 조림을 하면 맛있다. 오래전 이 지역 토박이와 함께 이름깨나 알려진 식당을 찾았던 때가 기억났다. 주문했던 음식은 ‘우럭 포’ 구이. 쌀뜨물로 끓여내 젓갈로 간을 하는 ‘우럭 젓국’도 유명하지만, 태안의 우럭포 구이도 못지않다.
쇠약해지신 팔순의 어머니를 위해 조기 새끼를 샀다. 가장 좋아하시는 반찬이다. 주문했던 음식은 ‘우럭 포’ 구이. 쌀뜨물로 끓여내 젓갈로 간을 하는 ‘우럭 젓국’도 유명하지만, 태안의 우럭 포 구이도 못지않다. 쇠약해지신 팔순의 어머니를 위해 조기 새끼를 샀다. 가장 좋아하시는 반찬이다. 유독 냄새에 예민해서 어머니가 생선 요리를 할 때면 비린내 난다며 타박을 했다. 조기 새끼 조리하실 때는 “창문 좀 열라”고 화내지 말아야 할 텐데….
# 발효한 굴로 담근 굴젓

어촌계에서 굴을 납품받아서 3년간 간수를 뺀 천일염에 절여 일주일간 발효한 굴을 사용한단다. 입자가 아주 고운 고춧가루를 사용해 필요할 때마다 무쳐내 판매한다고 했다.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보이지만 굴을 발효하는 방법, 발효 중 저어주고 관리하는 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설명. 통영 큰 굴의 경우 부드러워 바로 무쳐 먹거나 구워 먹는 게 좋다. 반면 서해안의 굴은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크기가 작고 질감이 단단해 씹는 맛이 좋다. 발효한 어리굴젓은 그 맛이 오묘하다.
시장에서 구매한 해산물로 음식을 만들어 주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건물 2층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장 내 식당은 대부분 깨끗하고 붐비지 않아 호젓하게 식사할 수 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물어보면서 식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날 여행에 동행한 중국계 미국인 친구 엘리자베스의 희망 메뉴는 갈치조림이었다. 큰 갈치를 한 마리는 조림으로 주문하고, 주꾸미 데침 요리를 더했다.
칼칼한 조림 양념과 폭신하고 풍부한 맛의 갈치의 조화가 훌륭했다. 주꾸미는 수분이 많아 많이 익힌다고 오징어만큼 뻑뻑해지지 않지만 주꾸미를 데칠 때는 뜨거운 국물에 다리가 반 정도 말리면 꺼내 먹는 게 좋다. 그 정도 익었을 때가 가장 촉촉하고 말랑말랑 부드럽다. 주꾸미 데친 국물에 칼국수를 넣어 해물 칼국수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청주나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면 더 완벽했을 식사였다.
강태안 미식여행가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