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손아섭이 헬멧에 타격 동작과 관련된 글을 빽빽하게 적어놓았다(왼쪽). NC 박민우 역시 헬멧에 타격 및 마음 자세에 도움이 되는 글을 써놓고 헬멧을 쓸 때마다 되새긴다(오른쪽).
롯데 손아섭이 헬멧에 타격 동작과 관련된 글을 빽빽하게 적어놓았다(왼쪽). NC 박민우 역시 헬멧에 타격 및 마음 자세에 도움이 되는 글을 써놓고 헬멧을 쓸 때마다 되새긴다(오른쪽).

- 프로야구 ‘헬멧이야기’

따로 정해진 규격 없고
무게는 대략 450~500g
재질은 대부분 ‘탄소섬유’
소비자 가격 25만원 선
야수 42% ‘검투사 헬멧’

최근엔 ‘유리섬유’ 美헬멧
선수들이 직접 구매 사용
“더 안전하고 내구성 좋아”

‘타격은 타이밍’ 등 써놓고
타석 들어설때마다 되뇌어


야구는 ‘장비의 스포츠’로 불린다. 공은 기본이고 유니폼, 스파이크, 글러브, 배트, 헬멧 등 장비가 다른 종목에 비해 많은 편이다. 특히 헬멧은 타자의 머리를 보호하는 안전용품이다.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이 쓰는 헬멧의 소비자 가격은 25만 원 선. 10개 구단은 선수 1인당 1개의 헬멧을 매년 초 ‘보급품’으로 지급한다. 필수장비이기 때문. 훈련, 경기 도중 헬멧이 파손되면 구단에서 새것으로 교환해준다.

그런데 최근엔 선수가 직접 돈을 주고 헬멧을 구입하는 게 ‘유행’이다. SK의 이재원과 정의윤은 지난해 미국 플로리다 전지훈련 당시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쓰는 미국 헬멧을 구매, 착용하고 있다. NC의 양의지, LG의 이형종과 유강남 등도 미국 헬멧을 구입했다. 미국 헬멧의 가격은 500달러(약 58만 원) 전후로 비싼 편이지만, 선수들은 “더 안전하고 내구성이 좋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헬멧은 무게가 900g 전후이며 1㎏이 훌쩍 넘는 것도 있다. 국내 헬멧(450∼500g)보다 배로 무겁다. 그래서 미국 헬멧을 쓰는 타자들은 대부분 팀에서 중심타선을 이루는 ‘거포형’이다. 국내 헬멧과 미국 헬멧의 무게 차이는 소재 때문에 생긴다.

키움의 주효상은 경기 도중 동료가 투구에 머리를 얻어맞는 걸 보곤 더 튼튼한 헬멧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외국인 타자 대니 돈이 2017년 중도 퇴출되면서 주효상에게 자신이 쓰던 미국 헬멧을 선물했다. 주효상은 물려받은 헬멧을 일명 ‘검투사 헬멧’으로 개조했다.

헬멧의 디자인은 ‘귀’가 없는 것과 한 개 있는 것, 두 개 있는 것 등 크게 3가지로 나뉜다. 하지만 귀가 없는 헬멧은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양 귀 헬멧은 오른손 투수, 왼손 투수에 따라 타석이 바뀌는 스위치 타자들이 썼으나 역시 최근에는 자취를 감췄다. KT의 외국인 타자 멜 로하스 주니어는 스위치 타자지만 귀 한 개짜리 헬멧 2개를 왼쪽 타석, 오른쪽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바꿔 쓴다.

경기에서는 귀 한 개짜리 헬멧, 그리고 검투사 헬멧이 주로 쓰인다. 검투사 헬멧은 투수가 던진 공으로부터 얼굴을 지킨다. 뺨은 물론 턱까지 보호하기 때문. 2019 신한은행 마이카 프로야구 1군 엔트리에 등록된 야수 144명 중 41.7%인 60명이 검투사 헬멧을 쓰고 있다. 키움이 14명으로 가장 많고, 한화가 2명으로 가장 적다. 키움의 경우 2군 선수들까지 더하면 무려 30명이 검투사 헬멧을 애용한다. 키움 관계자는 “투수가 타자의 얼굴에 공을 던지는 경우는 적지만, 투구가 배트 등에 튕기며 방향이 바뀌면 얼굴을 얻어맞곤 한다”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선수가 검투사 헬멧을 애용한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검투사 헬멧을 처음 사용한 건 은퇴한 심정수다. 물론 사연이 있다. 심정수는 현대 소속이던 지난 2001년 롯데와의 경기 도중 강민영의 직구에 얼굴을 얻어맞아 광대뼈가 함몰됐다. 그리고 심정수는 검투사 헬멧과 함께 복귀했다. 검투사 헬멧은 염경엽 SK 감독이 ‘발명’했다. 염 감독은 당시 현대 구단 프런트였으며 직접 연장을 들고 검투사 헬멧을 제작해 큰 사고를 겪은 심정수에게 씌웠다. 이후 이종범(은퇴), 조성환(은퇴) 등 얼굴에 공을 얻어맞은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검투사 헬멧을 착용했고, 지금은 보편화됐다.

헬멧은 타자들에게 분신이자 수호천사다. 타석에 들어설 땐 어김없이 헬멧을 손에 들고, 머리에 쓴다. 타석에 들어가면서, 투수와 승부 내기에 앞서 헬멧을 쓰며 마음을 다잡는다.

롯데의 손아섭은 헬멧 챙에 ‘뒷다리 70, 앞다리 30’ ‘오른쪽 어깨는 낮춰라’ ‘왼 팔꿈치는 들어라’ 등의 문구를 빽빽하게 적어 놓았다. 안타, 홈런을 날리기 위한 루틴을 헬멧을 쓰면서 되새긴다. 수험생이 공부하는 책상에 각오, 다짐, 문제풀이 요령을 적어두는 것과 같다. NC의 박민우는 ‘타격은 타이밍’ ‘시선은 아래로’라는 문구를 역시 헬멧에 적어 두고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습관처럼 읽으며 스스로 동기를 부여한다.

헬멧은 타석에서 늘 타자와 함께하기에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 짜릿한 손맛도 함께 느끼고, 슬럼프 또한 함께 겪는다.

헬멧은 온전히 나를 위한 나만의 장비지만, 따듯한 동료애를 표현하기도 한다. 한화의 정은원은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된 동료 하주석의 쾌유를 비는 ‘JS #1’을 헬멧에 적었다.

수비할 때 쓰는 모자는 구단에서 1년에 1인당 최대 5개까지 나눠준다. 헬멧은 수비 모자보다 교체 주기가 길다. 대개 헬멧 교체 주기는 1년. 헬멧의 소재는 강도가 높아 파손되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헬멧을 1년 넘게 사용하는 선수들도 있다. 기분 좋은 기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다. KIA의 나지완은 타격 훈련을 할 땐 구단이 예전에 지급했던 ‘T’로고가 박힌 헬멧만 쓴다.

안치용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선수 대부분은 깨지거나 사용할 수 없을 때까지 헬멧을 바꾸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헬멧과 함께한 시즌에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 헬멧을 5년 이상 쓰기도 하는데, LG의 박용택은 6년 이상 사용했다”고 귀띔했다.

정세영 기자 niners@munhwa.com

◇헬멧 = 따로 정해진 규격이 없고,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사이즈는 둘레 기준, S(55∼56㎝)부터 XO(61∼62㎝)까지 규격화돼 있다. 소재는 천차만별이다. 몇 년 전까진 일반 플라스틱보다 충격과 열에 강한 ABS 플라스틱이 주로 사용됐지만 최근 국내, 그리고 일본에서 생산되는 헬멧은 대부분 카본 파이버(탄소섬유)로 제작한다. 미국산 헬멧은 글라스 파이버(유리섬유) 재질로 만들어진다. 유리섬유는 플라스틱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유리 가루를 섞어 만든다. 미국 헬멧은 무겁지만, 충격 흡수에 강하고 유연하다.
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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