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네 / 이미나 지음 / 보림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그리운 공간이 있다. 언제 한 번 그곳에 찾아가봐야지 생각하면서도 미루게 되는 건 날마다 찾아오는 분주한 일거리가 추억을 경계하며 보초를 서기 때문이다. 그림책 한 권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삼십 분 남짓으로 길지 않다. 하지만 그림책은 되풀이했던 아쉬움에 균열을 내고 그리운 장소에 성큼 다녀오게 해준다. 그래서 바쁜 하루일수록 그림책이 고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돌아보는 시간 없이 나아가는 법은 없다.

이미나 작가의 ‘나의 동네’는 좋았던 한 시절의 계절과 공기, 소리와 바람을 간직한 그림책이다. 자전거를 들고 오래된 계단을 오르는 우편배달부와 그를 지켜보는 파랑새의 눈망울, 계단 너머로 풀빛이 아스라하게 바라보이는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 작품에는 뒷모습이 자주 나온다. 우편배달부를 비롯해 다람쥐도, 나비도, 들개도, 고양이도 어딘가를 보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 함께 무언가를 찾아서 한 발씩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속도는 느리고 그림이 전해주는 옛 골목의 투박한 기운, 습습함과 금방이라도 만져질 것 같은 두툼한 잎사귀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터널의 날들’에서부터 강렬한 흡인력에 매료됐던 이미나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려고 책을 펼쳤다가 의외로 감탄한 것은 문장과 이미지의 어울림이었다. 몇몇 문장과 그림은 서로 약속한 풍속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꽃밭에서 조개를 줍다가 사실 여기가 아주 옛날에는 바다였던 건지 너에게 물어보던 일”이라든가 “무화과가 잘 매달려 있는지 매일 세어봤는데 개미들이 열매마다 구멍을 내는 바람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생각”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이 비밀 가득한 우정 속으로 한 발 더 깊게 걸어 들어가 대화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크고 작은 생명체는 여전히 동네를 지키고 있었고 그들 가까이 바짝 밀고 들어가 찾아낸 자연의 표정은 멈칫할 정도로 강렬하다.

내가, 네가 누구였는지 작가는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들개들의 탐스러운 잿빛 털과 날카로운 눈동자가, 길고양이의 쫑긋한 두 귀가 당신들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늘어진 회상으로 가득한 추억 이야기는 그만 읽고 싶었다면 이 그림책을 권한다. 사랑했던 동네는 속속 사라지고 있지만 그곳을 지키던 자존감 높은 생명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얼마나 당당한지 느낄 수 있다. 살아나갈 힘이 솟는 그림책이다. 44쪽, 1만6000원.

김지은 서울예대문예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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