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바라본 거제도. 오른쪽 상단의 아치형 다리는 거제대교, 그 아래 좁은 해협은 견내량(見乃梁)이다.
통영에서 바라본 거제도. 오른쪽 상단의 아치형 다리는 거제대교, 그 아래 좁은 해협은 견내량(見乃梁)이다.

시인 유치환의 고향, 거제·통영

거제에서 태어나고 통영서 자라
2000년 거제 둔덕골 생가 복원
통영 청마거리엔 옛집터 표지석

동료교사로 만난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와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
죽기 전까지 20년간 매일 편지

생명력이 넘치고 남성적 詩語에
아름답고 서정적 사랑詩 더해져


고향(故鄕)의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며 또 다른 의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청마 유치환의 고향은 지금도 여전히 두 곳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제시는 시인이 태어난 고향이고 통영시는 그가 자라난 고향이다.

2003년에 유치환의 출생지 논란이 결국 재판까지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선은 의아심이 들었다. 한때는 ‘충무’라고도 불리던 통영이 거제시와 통영시로 분리되면서 불거진 것으로 결국 두 지방자치단체가 서로 유치환이 자기의 행정구역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시인의 출생지인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의 5번지의 옛 지번(地番)은 경남 통영군 통영면 동부동 5통 16호이다. 학계(學界)에서는 이미 여러 연구와 조사를 거쳐 그 이전부터 ‘거제도 둔덕골’을 시인의 출생지로 인정했으니, 애당초부터 학술 논쟁도 아닌 법정 다툼으로 비화할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유족의 증언과 확인도 있었으니 새삼 논란이 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유치환이 자신이 ‘자랐던 집’을 “한반도의 남쪽 끝머리에 있는 바닷가 통영(지금의 충무시)”이라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세 살 무렵인 유아 시절에 거제도를 떠났고 상대적으로 성장한 곳에 대한 기억과 애착이 더 컸기 때문이리라.(수필집 ‘구름에 그린다’에 수록된 ‘나의 시 나의 인생’)


유치환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에는 늘 거제와 통영 중에서 어디를 먼저 갈 것인가를 놓고 버스터미널 매표소 앞에서 망설인다. 누군가는 이웃한 두 지역에 각기 별도의 문학관을 운영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 어느 쪽이 이기든 별 상관없는 처지에서는, 그 ‘볼썽사나운’ 싸움 덕에 되레 두 몫의 볼거리를 얻은 셈이니, 그저 잠시 고민할 따름이다. 집을 나서며 아예 두 곳 모두를 가볼 속요량이었으니, 이마저도 행복하다.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의 살으신 곳/ 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거제도 둔덕골’). 청마의 생가는 2000년에 복원했지만, ‘청마기념관’은 이런저런 이유로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8년에야 개관했다. 전시관 입구 왼편으로 큼지막하고 현대적인 시비와 시인의 전신 청동상이 있는 조형물이 있고, 복원한 생가는 그 뒤편에 있다. 오래 준비한 탓인지, 게시물과 유품 배치에 세심하게 애쓴 흔적이 단박에 보인다.

시인의 ‘태 자리’인 이곳에는 그의 유택(幽宅)도 있다. 유치환의 장지는 애초 부산 사하구 승장산 기슭이었으나, 이후 양산을 거쳐 30주기인 1997년에 마침내 “지전당골” 선산으로 이장했다. 기념관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그곳은 애써 찾아갈 만하다. 묘소 주변에 ‘청마의 길’을 조성했다. 처음엔 그저 흔한 시비 공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시비 산책로’는 둔덕만(灣)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청령정(청령亭)까지 이어진다. 오솔길의 양옆으로 족히 수십 개는 됨 직한 시비들이 있다. 그냥 바위에 그의 시를 새기지 않고 그저 써놓은 것들도 제법이다. 풀벌레와 산새 소리를 음악 삼아, 자연과 어우러진 시비들을 천천히 둘러보면 유치환의 시선집 한 권을 다 읽은 듯하다. 떠나오면서도 다른 계절에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며, 연신 아쉬움에 뒤돌아본다. 둔덕면사무소 어귀에 있는 ‘청마 고향 시비’는 1989년 봄에 동네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바로 옆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이제 거제대교를 건넌다.

경남 통영시 정량동에 있는 청마의 생가. 태평동에 있던 것을 지난 2000년에 청마문학관 위쪽으로 이전 복원했다.
경남 통영시 정량동에 있는 청마의 생가. 태평동에 있던 것을 지난 2000년에 청마문학관 위쪽으로 이전 복원했다.

통영에서는 우선 ‘청마 거리’를 찾아야 한다. 강구안에 있는 중앙시장 뒤편, 이제는 표지석만 남은 태평동 옛 집터를 지나면, ‘중앙동 우체국’은 금방이다. 우체국 정문 왼쪽에 안내판과 시비 그리고 빨간 우체통이 나란히 서 있다. 펼쳐진 책장 모양의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시비에는 시 ‘행복’의 전문을 새겼다. 유치환과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1916∼1976)는 1947년 무렵 통영여자중학교에서 동료 교사로 처음 만났다.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과 아이 딸린 청상과부의 사랑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만날 수 없기에 아니, 만나서는 아니 되기에” 유치환은 자신의 “목숨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영도에게 대신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마치 일기처럼 거의 매일같이 이십여 년 동안 이어졌다.

유치환은 또한 이즈음부터 새로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깃발’과 ‘바위’, ‘생명의 서(書)’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 작품은 거침없고 생명력이 넘치는 문체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생의 본성을 직시하며, 그 모순과 허무를 의지적으로 극복하려는 지극히 남성적인 시였다. 여기에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토로하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연시들이 이제 더해졌다. ‘행복’과 ‘목마름’, ‘나의 노래’와 ‘그리움’ 같은 참으로 결이 다른 시들 말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전문).

이영도는 물론 처음엔 “뭍같이 까딱 않던” 마음이었으나,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시조 시인답게 그 마음을 시에 담았다. 첫 번째 시조집 ‘청저집(靑苧集)’(1954)에 수록한, 끝내 제목조차 붙이지 않은 시 한 편,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무제1’ 전반부). 1967년 청마가 갑자기 세상을 뜬 바로 그해에, 정운은 그동안 곱게 간직했던 5000여 통의 편지 중에서 200여 편을 추려 서한집(書翰集)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를 엮었고, 비로소 두 시인의 사랑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영도가 그 이듬해에 발표한 시조, 이번에도 제목은 없다. “차라리 말이 없어 당신은 바위인데/ 내 인생은 여울지는 실계곡/ 춘정(春情)에 돋는 속잎을 멧새들이 노닌다.”(‘무제2’ 후반부). 단박에 유치환의 시 ‘바위’가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이 청마에 관해 물으면, 정운은 늘 말없이 고운 미소만 지었다고 전한다.

누군가는 두 시인의 사랑에서 끝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을 읽었고, 대뜸 불륜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유치환은 참으로 행복했으리라. 그는 속내 이야기를 적어 보낼 사랑이 있었고, 이를 소중히 간직해 준 사람이 있었다. 편지도 사랑처럼 보내는 것이 받느니보다 행복하기 때문이다.

청마의 시비들은 거제에서 실컷 보았지만, 그래도 통영 남망산 시민문화회관 근처에 있는 오래된 ‘깃발’ 시비는 챙겨야 한다. 1974년 세운 이 시비는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있고, 그 앞 도로에 나란히 주차해놓은 자동차들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모양이 참 독특하다. 검은 곰방대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흘러가는 구름과도 많이 닮았다. 다만, 받침대가 시비에 비해 지나치게 커서 안정감은 없다. 지난 세월에 비해 시비의 글씨가 선명한 것이 최근 다시 손본 듯하다.

통영 ‘청마문학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가파른 계단이다. 등 뒤에서 조금씩 넓게 펼쳐질 풍경을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문학관 입구에서야 겨우 숨을 돌리며 항구와 바다를 두 눈에 담는다. 2000년에 문학관을 개관하면서 본래 태평동 522번지에 있던 유치환의 옛집도 이곳으로 옮겨 복원했다. 문학관의 규모는 아담하지만,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 발자취라는 주제에 따라 각종 유물과 관련 서적을 전시하고 있다. 게시물의 내용도 만만치 않다. 다만, 이제는 습관처럼 찾아보는 시인 연보(年譜)의 첫 문장은 여전하다.

전시관 위쪽에 있는 ‘옛집’을 둘러본다. 시인의 외조부는 통영에서 한약방을 경영했고, 청마의 아버지 유준수도 이런 장인의 도움을 받아 한의학을 익혀 지금의 통영 중앙시장 근처 태평동에 한약방을 차렸다.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언(行而不言)하시는 아버지는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귀고(歸故)’). 처마 밑에 매달아놓은 약초봉지들이 참으로 정겹다. 이 ‘옛집’은 분명 유치환이 시인으로 성장했고 그의 문학이 시작된 산실(産室)이다. 내친김에 통영기상대 앞까지 조금 더 올라가 보면, 항구와 선착장, 푸른 바다와 섬들, 그보다 더 푸른 봄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동안은 그만 감탄마저 잊는다. 눈 호강에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호젓한 농어촌 마을 속 거제의 ‘기념관’은 접근성이 불편하지만, 그 덕에 되레 한가로움과 여유를 한껏 누릴 수 있다. 항구도시의 활발함과 관광지의 편의성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통영의 ‘문학관’을 먼저 찾을 일이다. 어느 경우든, 눈이 시리도록 고운 남해와 그 멋진 풍경은 넘치도록 함께한다. 전시관 두 곳을 모두 둘러보고 느낀 아쉬움 하나. 전시관과 ‘복원한’ 생가 혹은 옛집, 그리고 게시물과 전시물에서 별다른 차이점을 느낄 수 없어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듯하다. 이런 점을 개선하며 서로 차별화를 도모한다면, 앞으로는 누구든지 ‘선택’이 아니라 ‘으레’ 다른 곳으로 발길이 절로 향하게 될 것이다.

글·사진 = 박광수

불문학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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