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짧지만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나라 미국. 세계사에 영향을 준 미국의 굵직굵직한 장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금주법이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던 청교도인들은 영국에서처럼 물을 대신해 에일 등 술을 만들어 마셨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술은 물의 용도를 넘어 취하기 위해 마시는 음료가 돼 버렸다. 1846년 11월 25일 조지 무어와 메리 무어 사이에서 태어난 캐리 네이션(Carrie Amelia Moore Nation)이 살던 시대도 그랬다. 미국 금주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는 180㎝ 정도의 키에 70∼80㎏의 몸무게로 큰 체구를 갖고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손도끼를 들고 술집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저승사자와도 같았다.

캐리 네이션은 자신의 집에서 묵던 내과 의사 찰스 글로이드와 사랑에 빠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867년 11월 21일 결혼한다. 그는 여느 여성처럼 단란한 가정을 이뤄 살고 싶었지만, 남편의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얼마 후 임신한 그는 남편을 두고 부모 집으로 돌아와 1868년 9월 27일 딸을 출산한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남편이 사망하자 그는 유산인 의료장비와 아버지가 준 땅을 팔아 작은 집을 짓고 시어머니와 함께 딸을 키우며 생활하게 된다. 그는 1872년 9월 미주리주 소재 워런즈버그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교원 자격을 취득해 홀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회운동에 조금씩 눈을 돌린다. 관심사는 여성의 지위 향상, 사회 진출과 참정권 문제 등이었다.

캐리 네이션은 1874년 변호사이자 워런즈버그 신문 편집자였던 데이비드 네이션을 만나 19세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재혼한다. 1877년 텍사스로 이주한 그는 10여 년간 리치먼드에서 생활하며 종교에 관한 강한 믿음을 갖게 됐고, 1889년 남편이 신학 공부 후 목회자가 되면서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는 기독교 여성단체인 WCTU(Woman’s Christian Temperanjce Union)의 캔자스지부에도 참여하며 여성인권과 주류 판매금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캐리 네이션은 첫 남편이 알코올 중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 힘든 시절을 겪고 목사의 아내로 살면서 술의 문제점을 인식했다. 그는 교도소 수감자들의 재활을 돕던 중 모든 사회문제가 술로 인해 발생했다고 믿고 비폭력 주류 판매금지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술 판매가 금지된 곳에서도 버젓이 술집이 운영되자 그는 평화적인 방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술집들을 찾아가 돌을 던지며 공격하다가 나중에는 손도끼를 가지고 각종 기물을 부수며 영업을 못하게 했다.

캐리 네이션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활동으로 문제를 일으켜 30차례 이상 경찰에 체포돼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지만 풀려나면 다시 활동을 이어갔다. 너무 왕성한 활동 때문이었는지 연설을 하다가 쓰러진 그는 1911년 6월 9일 숨을 거둔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행동가들이 활동을 계속해 1919년 10월 28일 금주법이 제정되고 1920년 1월 16일 알코올 규제를 담은 수정헌법 제18조가 통과됐다. 이들은 1920년 8월 18일 수정헌법 제19조까지 통과시켜 여성의 참정권까지 얻어냈다. 하지만 알코올 규제는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마피아들이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자금력까지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와 함께 그 영향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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