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호네커 옛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1987년 정상회담차 구 서독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한 의회연설은 아직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종종 인용되곤 한다. 그의 연설 요지는 한마디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물과 불처럼 합쳐질 수 없다”는 것이다. 분단 체제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자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가 응수하고 나섰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독재는 결합될 수 없다.” 협상에 의한 통일은 불가능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2년 뒤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극적인 현실로 나타났다.
소개한 호네커와 콜의 발언에서 보듯이 동서독은 겉으로는 평화 공존으로 교류 협력을 하면서도 물밑에서는 상대 체제를 흔들기 위한 치열한 심리전과 신경전을 펼쳤다. 서독은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접촉을 통한 변화’, 이른바 동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동독은 이에 맞서 비교우위인 비밀·침투 역량을 강화해 서독 사회 전반에 친(親)동독 세력을 확산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양지와 음지의 대결은 오늘의 남북한 상황을 연상케 한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 공개된 동독의 비밀공작 기관 슈타지를 해부한 ‘슈타지 보고서’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경쟁은 서독이 주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공작은 동독이 거의 압도한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좌우 진영을 떠나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한마디로, 서독 사회의 내부 분열도 베를린 장벽 균열만큼이나 위험 수위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절대적 우위에 있던 서독 사회에 파고든 친동독 세력의 암약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호네커와 ‘형제적 동지애’를 맺은 북한 김일성과 동독 유학 경험이 있는 김정일이 평소 이런 뛰어난 동독의 공작 역량을 눈여겨봤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독 공산당은 긴장 완화를 틈타 서독 내 독일평화연맹(DFU)을 조직해 ‘평화투쟁’을 합법화시켰다. 그리고 평화 명칭을 앞세운 각종 시민단체와 언론·종교·노조·학술 조직 등을 대중적 전위조직으로 만들어 ‘평화의 척후병’으로 정당 등 제도권에 침투시켰다. 그래서 내재적 접근식 평화정책 곧,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자는 진보학자와 정치인들을 내세워 서독의 보수 정당과 자유민주 세력을 ‘평화의 적(敵)’으로 매도했다. 나아가 주요 보수 인사들에 대한 실시간 도청·감청을 통해 명예 실추 공작과 허위 정보 살포, 여론조사 조작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회연대 형식으로 총력 동원했다.
문제는, 정작 서독 연방정보부(BND)와 헌법보호청(BfV)은 이 같은 통일전선 공작 활동의 전모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서독 내 2000여 명의 슈타지 요원과 이들에게 협조한 첩자가 사회 저명인사와 교수를 포함, 3만여 명이나 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보좌관인 귄터 기욤이 간첩이었고, 헌법보호청 동독과장 한스 요아힘 티드게와 클라우스 쿠론 방첩과장, 그리고 BND의 핵심 국장 알프레드 슈플러도 슈타지의 첩자로 드러났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북한이 본격적으로 선전·선동하는 민족 공조론과 ‘전쟁이냐 평화냐’하는 평화 공작은 바로 이 동독식(式) 모델을 따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사이버전 능력을 보유하고 인터넷을 ‘해방공간’으로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북한에 동독은 살아 있는 실전 경험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를 이용해 정작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로부터 안보(安保)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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