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책으로 /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문해력’은 인류 문화의 중심
동물과 구별되는 결정적 요인
문명의 산물인 디지털기기가
독서의 기반 무너뜨리고 있어
디지털포맷의 얄팍한 정보들
공감·성찰의 경험 못하게 해
아이들에게 종이책 보여주라
‘깊이 읽기’를 경험하게 하라
책에서 독서의 과학자 매리언 울프가 말한다. 인간은 책을 읽고, 책은 인간을 바꾼다. 읽기를 배우는 것은 단지 글자를 인식하고 뜻을 파악하는 것 이상의 변화를 우리 내부에 일으킨다. 읽기는 뇌의 정보전달 회로를 깊고 탁월하게 변화시킨다. 몇 년에 걸친 오랜 분투를 통해서 우리 안에 간신히 생겨나는 힘, 즉 문해력(literacy)이야말로 인간 능력의 정수이며 인류 문명의 동력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글을 읽을 수 없다. 우리는 호모 레겐스(Homo Legens)다. ‘읽는 힘’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결정적 문턱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과 글이 똑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은 하지만 글은 못 읽는 문맹이 존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둘은 다르다. 울프에 따르면, ‘말하는 유전자’는 일부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타고나므로, 말하고 듣는 일은 특별한 노력 없이 아무나 쉽게 할 수 있고, 심지어 다른 동물들도 유사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읽는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누구나 오랜 학습 과정을 통해 뇌의 회로를 능동적·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감으로써 읽고 쓰는 일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
후천적으로 읽기 능력을 갖추는 것이 진화에 유리하지 않다면, 8000년 전에야 비로소 나타나 “‘진화의 시계’에서 읽기는 자정 직전에 자리할 뿐”인 문자 문화는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읽는 뇌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성찰”의 힘을 통해 사유의 깊이와 높이를 더해감으로써 문명의 발전을 이룩했고, 결국 ‘지구의 지배자’가 됐다. 읽기를 습득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인류의 문명은 문해력의 문명이다.
울프는 전작인 ‘책 읽는 뇌’에서 인지 심리학 연구를 통해 읽기가 인간 발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밝혀냄으로써 전 세계적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울프가 그 책을 쓰는 동안, 또 그 책을 쓴 이후에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세상이 변하는 중이다. 읽기의 문명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읽기의 힘을 통해 이룩한 가장 창조적 산물인 디지털 문명의 첨단 기기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문화에서 읽기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우리 일상에서 읽기를 추방하고 있다.
‘다시, 책으로’. 제목의 온도가 정말 뜨겁다. 오늘날 읽기는 외롭고 또 위태롭다. 디지털 문명의 압박 속에서 독서의 고독과 위기가 깊어 갈수록 이 목소리는 더욱더 절절해질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읽기를 둘러싼 두 가지 격렬한 변화가 동시에 나타나는 중이다. 사람들은 디지털 포맷으로 된 얄팍하고 씹기 좋은 정보에 중독돼, 복잡한 현실을 다루는 길고 어려운 텍스트는 읽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셜미디어에서 가상현실 게임에 이르는 다양한 디지털 경험에 함몰됨으로써 읽기 자체를 아예 회피하려 한다. “읽기의 질이 사고의 질을 보여 주는 지표”라면 좀처럼 읽지 않는 데다 어려운 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인간 사고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여섯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짧고 슬픈 소설이다. 작가는 헤밍웨이. 이 문장을 읽고 어떤 장면과 아릿한 감정을 떠올릴 수 없으면 깊이 읽기를 습득하지 못한 것이다.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파악함으로써 공감을 일으키고, 한걸음 떨어져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함으로써 바람직한 인생을 떠올리며, 정보의 이면을 고찰함으로써 대안을 찾아내는 비판적 사고를 북돋우는 뇌의 정보처리 회로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거나, 디지털 읽기에 중독되면서 이 회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정보는 힘을 주는 도구도, 해방의 도구도 아닌 주의 분산과 기분 전환, 일종의 오락이 됐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인간의 주의력을 빼앗는 경험에 끝없이 노출되고, 외부에서 밀려드는 자극에 반복해 반응할 때, 뇌의 가소성이 작용하면서 일종의 퇴행이 일어난다. ‘생각하는 힘’을 인류한테 가져다주는 데 도움을 준 뇌의 깊은 연결망이 파괴되면서 집중하고 몰입하는 힘이 떨어져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자극에 열광하는 ‘초보 수준의 뇌’로 돌아가는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자라 깊이 읽기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깊은 사고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화면 경험에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어른들 역시 사소한 자극에도 점차 주의를 빼앗기면서 항상 산만한 상태로 살아간다. 화면에서 글을 많이 읽는다고 안심할 수 없다. 내부 기억에 통합하지 못할 정도로 처리해야 할 정보량이 늘어나면, 뇌는 읽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한다. 단어와 문장을 살펴가면서 씹어 읽는 대신 이곳저곳 건너뛰며 눈에 띄는 것만 훑어 읽는 방식으로. 여기에 익숙해지면 단기이해는 가능해도 장기기억은 불가능하다. 읽기가 축적되지 않고, 어떤 글을 읽든 늘 새로 읽는 느낌에 빠져든다. 때로는 읽은 문장을 또 읽게 된다. 또 어렵고 힘든 글을 읽지 못하게 된다. 추상적이고 엄밀한 개념과 개념이 밀도 높게 이어지고, 세밀하고 섬세한 감각을 표현하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문장들로부터 도망치고 싶게 된다. 심지어 평생 읽기 습관을 들여온 울프 본인조차도 디지털 읽기가 부추기는 주의력 분산에 저항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에서 동시에 문해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양손잡이 읽기 뇌’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매체로든 깊이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 어른들이야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시 독서를 시작하면 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 울프에 따르면, 아이들이 무릎에서 컴퓨터로 너무 빨리 옮겨가지 않도록 오랫동안 반복해서 종이책을 읽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아울러 아이들이 음악, 영상, 게임 등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소비가 아니라 언어 발달에 맞추어 섬세하게 설계된 코딩과 프로그래밍 도구들을 즐기게 해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독서를 하지 않는 이들은 가짜뉴스에 자주 빠져들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약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저지르기 쉽다. 깊이 읽기가 무너지면 깊은 사고를 하는 시민들도 사라진다. 따라서 ‘다시, 책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의 의무가 돼야 한다. 360쪽, 1만6000원.
장은수 이성과감성콘텐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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