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발레단 창작발레 ‘호이랑’ 여수 세계초연

대한제국 시절 ‘일사유사’ 각색
男裝군인 여성 ‘랑’의 일생 다뤄

80인조 오케스트라 웅장한 음향
꽉 찬 무대에 관객들 깊게 몰입


“서양 발레를 한국적 소재로 동화처럼 풀었어요. 대중이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좋아할 만한, 아주 새로운 스타일의 발레가 탄생했다고 봅니다. 오셔서 그저 즐겁게 보고 가셨으면 합니다.”

강수진(52)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신작 ‘호이랑’ 초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7일 전남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에서 펼쳐진 무대를 보고 나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클래식 격을 지키면서도 대중 친화적이고, 한국적이면서도 글로벌 감각을 지닌 매우 독특한 작품이 나왔기 때문이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무용수로서 이번 작품을 안무한 강효형(31)은 첫 무대를 마친 후 얼굴이 환해졌다. 공연 전엔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그는 여수 관객들이 첫 무대에 대해 열광적 반응을 보이자, 비로소 미소를 띠었다. “일할 때 잘 웃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던 서재형(49) 연출도 웃는 얼굴로 스태프들과 자축했다. 그는 “대중에게 편히 다가가는 작품을 만들려고 수없이 고치며 1년 정도 고생했다”고 밝혔다.

예술감독과 안무, 연출가가 한목소리로 말한 것처럼 이번 발레는 스토리에 초점을 맞췄다. 대한제국 언론인 장지연이 엮은 ‘일사유사(逸士遺事)’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아름(42) 작가가 각색했다.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여성의 몸으로 남장을 하고 군에 들어가 적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는 ‘랑’이 주인공이다. 랑은 군 생활 중에 사랑하게 된 사령관 ‘정’ 앞에서는 한없이 여린 여인이지만, ‘정’을 지키기 위해 반란군 수장 ‘반’에게 강력하게 맞서 싸우는 캐릭터다.


이야기에 쉽게 몰입하게 되는 것은, 숨 가쁘게 몰아치는 군무 덕분이다. 군복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쉴 새 없이 도약하며 검무(劍舞)를 펼친다. 주인공 랑은 이런 남성 무용수들과 함께 똑같이 움직이며, 때로는 그들을 제압하는 몸짓을 보여준다. 강수진 감독은 “여성 무용수의 신체 특징을 고려할 때 어마어마한 연습량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초연을 마친 후 무대 뒤에서 만난 박슬기(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는 강 감독 말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랑 역할을 한 그는 그때까지도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서양 발레에 동양 검술을 입힌 이번 작품의 시도는 성공적이다. 음악을 국악이 아닌 서양 클래식으로 선정한 것도 절묘했다. 안무가 강효형이 직접 선정했다는 홀스트, 브람스, 시베리우스, 차이콥스키의 음악들은 춤 동작에 딱 맞아떨어져서 감탄을 자아냈다. 막판에 펼쳐지는 주인공 남녀의 파드되(2인무) 배경 음악이 브루흐의 ‘스코티시 판타지(Scottish Fantasy)’인 것도 좋았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선율이 여운을 길게 주기 때문이다.

2015년에 안무가로 데뷔한 강효형은 이듬해 만든 ‘허난설헌 - 수월경화’를 통해 크게 인정 받았다. 이번에 훨씬 큰 규모의 신작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이겨내고 안무가로서의 대성 가능성을 보여줬다. 발레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연출가와 협업하게 한 국립발레단 측의 판단도 적절했다. 안무, 연출의 합이 잘 맞은 작품이 나왔다.

그런데 시대 배경이 중요하지 않은 팩션이라도 조선 시대를 상정한 스토리에 고대인들이 숭상한 삼족오(三足烏) 솟대 조형물이 나오는 것은 의아스러웠다.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루이자 스피나텔리가 꾸민 의상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동화 분위기에 맞게 파스텔 톤으로 만들었다는데, 굳이 한복이 아니라도 한국 정체성이 깃든 복색이었으면 어땠을까.

초연에서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치용이 지휘한 80인조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음향이 여느 공연보다 생생하게 객석에 전달됐다는 것이다. 예울마루 측에서 객석 앞부분을 임시로 뜯어서 오케스트라 무대를 확장한 덕분이었다. 예울마루 측은 “1021석 규모의 객석 중 100여 석을 줄였는데, 지역에서 초연하는 국립발레단 신작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해졌으면 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국립발레단은 18일에도 이어진 여수 공연을 ‘세계 초연’이라고 표현했다. 오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펼쳐지는 울산 공연에 이어 해외 무대에 진출할 계획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여수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장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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