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톈안먼 사태’ 30주년 맞는 中
관광 아니면 입구 통과도 못해
온라인 언급하면 고강도 감시
오프라인서도 화제에 못 올려
1989년 후야오방 사망 계기로
대학생들 대규모 민주화 시위
계엄군 무력진압 수백명 사망
유족들은 ‘어머니회’결성한뒤
진상규명·명예회복 요구하지만
中서는 이들의 존재조차 몰라
또다른 봉기 우려하는 中당국
애국주의·민족주의 강조하며
재평가 요구에 철저히 귀닫아
지난 25일 오후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의 중심 톈안먼(天安門)광장. 기자는 1989년 6월 4일 이곳 광장에서 유혈 진압된 톈안먼 민주화 운동 사건(톈안먼 사건) 30주기를 맞아 학생 시위대의 최후 거점이었던 광장 중앙의 인민영웅기념비 사진 촬영과 주변 시민들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 광장 입구 쪽 보안검사대에 섰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비자를 확인하면 기자 신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에 경찰이 비자를 확인하더니 다행히 들어가라고 했다.
멀리 있는 인민영웅기념비를 휴대전화로 찍으면서 가고 있었는데, 그 경찰이 곧바로 뒤를 따라왔다. 기자증을 내놓으라고 하더니 출입국 기록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 경찰은 기자를 다시 입구 쪽으로 데리고 갔다. 경찰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단순 관광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휴대전화와 가방을 갖고 광장으로 들어가면 취재 활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광장 사무소에 다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톈안먼 사건 30주기를 앞두고 외신 기자들의 취재를 전면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당국은 혹시나 광장에서 벌어질 톈안먼 사건 관련 활동과 취재 등을 막느라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미·중 무역전쟁 격화 속에 맞는 톈안먼 사건 30주기로 인해 자칫 민심이 흔들릴까 봐 중국 전역이 초긴장 국면에 들어섰다. 중국의 인터넷과 SNS 등에서 ‘톈안먼’은 금기어로 관련 언급은 고강도 감시 대상이다. 오프라인에서도 이 사건을 화제로 올리지 않는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30대 초반의 한 중국인은 “무역전쟁으로 미국에 대한 비난은 많이 하지만 톈안먼 사건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톈안먼 사건의 주역인 베이징대 학생들도 관련 행사 등 어떤 움직임도 없다. 베이징대의 한 외국인 교수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집권 2기가 시작된 지난해 이후 사회 감시와 통제가 더 심해지면서 지식인 사회도 크게 위축돼 있다”며 “톈안먼 사건은 잊힘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천안문 사태’로 불려온 톈안먼 사건은 1989년 4월 15일 개혁파 지도자였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후 전 총서기는 시장 개혁은 물론 정치 개혁과 민주화 등에도 호의적인 인물이었고, 청렴한 생활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1986년 말 대규모 민주화 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당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그다음 해 1월 총서기직을 내놔야 했다. 후 전 총서기에게 동정적이었던 여론으로 인해 그의 사망은 전국적인 추모 물결을 일으켰다. 대학생조직은 그해 반외세·반봉건 투쟁인 1919년 5·4 운동 70주년을 맞아 민주화 시위를 준비 중이었는데, 후 전 총서기의 사망으로 이를 앞당겼다. 4월 17일 베이징대 학생운동 지도부는 후 전 총서기의 공과 재평가, 국가지도자 및 가족의 연봉과 일체 수입 공개, 언론 자유 등 7개 요구 사항을 공산당에 처음으로 제시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관다오(官倒·이중가격제를 악용해 전매로 폭리를 취하는 관료)’의 부정부패와 급격한 물가 상승, 빈부 격차 확대 등으로 누적돼온 학생과 대중의 불만이 터진 것이다.
왕단(王丹) 등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꾸린 학생 시위대 2만 명이 4월 19일 톈안먼 광장에 모여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천막을 치고 밤에도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4월 21일 후 전 총서기의 장례식에는 톈안먼 광장에 학생과 노동자, 시민 등 10만 명이 운집했다. 당시 총서기였던 자오쯔양(趙紫陽)은 학생 시위가 후 전 총서기의 추모에서 시작됐고, 애당(愛黨)·애국 의도에서 비롯됐다며 온건한 처리 방침을 내놨다. 그러나 리펑(李鵬) 총리 등 강경파는 학생들이 동맹휴학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반당, 반사회주의 공격을 하고 있다며 적극 대처를 주장했다. 덩샤오핑의 추인을 받은 강경파는 4월 26일 공산당 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사설(‘반드시 깃발 선명하게 동란(動亂)에 반대하자’)을 통해 학생 시위를 외부 불순세력과 연계된 ‘동란’으로 공식 규정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다음 날 10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지방으로도 급격히 확산됐다.
5월 들어 학생운동 지도부는 동란 규정 철회와 애국·민주운동 인정을 요구하며 13일부터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자유와 민주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 만들어져 광장에 세워지기도 했다.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며 타협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당내 시위 진압 요구는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찰을 동원하는 방안이 고려됐다. 5월 1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방중을 계기로 공산당 지도부는 환영행사 등을 위해 학생운동 지도부에 톈안먼 광장 임시 철수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5월 중순을 넘어서도 사태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덩샤오핑은 인민해방군 동원 명령을 내리며 강제 시위 진압을 계획했다. 20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는 더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6월 3일 오후 공산당 중앙과 계엄군은 긴급회의를 열어 이들의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폭동과 난동)’으로 규정하고 6월 4일 새벽 광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저항 행위에 대한 ‘발포 명령’도 내려졌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해산과 결사 항쟁으로 갈렸다. 수만 명의 시위대 중 마지막까지 광장에 남은 인원은 3000명 정도였다.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시민들을 향한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특히 6월 3일 오후 10시쯤 계엄군과 수만 명의 학생 및 시민이 처음 충돌한 톈안먼 광장 서쪽 5㎞ 떨어진 무시디(木樨地) 지역에서 희생이 컸다.
기자가 25일 찾아간 무시디교에는 30년 전 희생자들의 원혼이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베이징시는 6월 19일 총 사망자 241명(군경 23명 포함), 부상자 군경 5000명, 민간인 2000명으로 공식 보고했다. 하지만 이 통계에 대한 신뢰는 높지 않다.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저서 ‘톈안먼 사건-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2016년)’에서 “칭화(淸華)대 학생자치부회 발표에 의하면 사망자 규모는 최대 4000명에 달한다”고 했다.
이후 사건의 여파는 30년 동안 이어지면서 비슷한 논란을 되풀이하고 있다. 30년간 톈안먼 사건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평가는 요지부동이다.
먼저 톈안먼 사건이 전개 중이던 5월 21일 공산당은 원로회의를 열어 자오쯔양의 총서기 직무를 정지시켰다. 당의 동란 규정을 어기고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게 이유다. 결정된 당의 노선과 방침에 한목소리를 내는 ‘원 보이스(one voice)’ 원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덩샤오핑 등 원로들은 당시 상하이(上海)시 서기로 학생운동에 강경하게 대처했던 장쩌민(江澤民)을 차기 총서기로 결정했다. 자오쯔양은 6·4 이후 3년여 동안 당의 공식적인 조사를 받았다. 그는 2005년 1월 17일 사망할 때까지 당적은 유지했으나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다. 당 분열 행위라는 비난을 받은 그는 끝까지 자신의 행위가 옳았다고 주장했다. 시 주석 등장 이후 부친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던 자오의 아들 자오얼쥔(趙二軍) 역시 포기했다. 시 주석이 정치적 관용을 존중하고 후야오방 전 총서기를 지지했던 원로 시중쉰(習仲勛)의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일말의 희망을 가졌는데 오히려 시진핑 1인체제 강화를 보면서 꿈을 접었다.
이날 톈안먼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2㎞ 떨어진 푸창후퉁(富强胡同·뒷골목) 6호에 있는 자오쯔양 고택을 찾았다. 매년 그의 기일이 되면 삼엄한 경계 속에 추모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 혁명 공묘(公墓)에 가지 못하고 화장된 유골은 여전히 자택에 안치돼 있다. 인근에서 만난 주민 정모(52) 씨는 주위를 살피면서 작은 목소리로 “부부가 죽은 뒤 딸 혼자 살고 있는데, 당국과 유골 매장 장소를 놓고 다투고 있다”고 전했다.
왕단과 우얼카이시(吾爾開喜), 차이링(柴玲) 등 학생운동 지도부는 체포된 후 형을 살았으나 나중에 풀려났다. 당시 반혁명 동란 분자로 1130명이 체포돼 구류 등의 처벌을 받고 대부분 석방됐지만 8명은 사형을 당했다. 반체제 인사가 된 왕단은 1990년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요청으로 석방돼 미국으로 망명했다. 우얼카이시는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가 반공산당 정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단식 투쟁에 동참한 류샤오보(劉曉波)는 반체제 인권·민주화 운동으로 201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2017년 7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희생자 유족들은 ‘톈안먼 어머니회’를 결성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희생자에 대한 배상, 진압 책임자 처벌 등 3가지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홍콩 언론이나 외신에 일부 나올 뿐이다. 중국인들조차 존재 자체를 잘 모르는 이들 어머니회 회원은 해마다 6·4 기념일이 돌아오면 강제로 베이징을 떠나 고향으로 보내지고 있다. 한때 180명에 달했던 회원은 지금은 50명 정도로 축소됐다. 톈안먼 어머니회 대변인 여우웨이제(尤維潔)는 최근 “우리는 30년을 버텨왔고, 앞으로도 진상 규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외침에도 중국 공산당이 귀를 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톈안먼 사건 논의를 오픈하는 자체가 단결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공산당의 내부 분열과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자오쯔양의 비서였던 바오퉁(鮑동)의 아들 바오푸(鮑樸)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톈안먼 사건이 재평가되면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진압한 것에 대해 현 지도부는 정통성 문제에 직면하고, 이는 당내 분열과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리펑 등은 톈안먼 사건에 대한 공식 규정을 변경하는 행위는 당 분열 시도로 간주한다는 경고를 보냈다. 최고 지도자들 역시 이런 관점을 유지해 왔다. 사건 당시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일당제가 흔들리는 상황과 국내 부르주아 자유화 세력의 발호가 결합해 발생한 시위에 대해 “동란 규정은 정당하다”는 논리다. 또한 톈안먼 사건을 재론하는 것은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고 공산당은 우려한다. 장량(張良·필명)이 쓴‘6·4 사건 진상’의 영문판 ‘톈안먼 페이퍼(Tiananmen Papers, 2001년)’의 공동 편집자 페리 링크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는 “중국 공산당은 6·4 재평가가 또 다른 사회 불안과 대중 봉기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융녠(鄭永年)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공산당이 6·4 운동을 재평가하면 결국 그 운동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를 포용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톈안먼 사건 이후 설득력이 약화한 사회주의를 대신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강조됐으며, 시 주석이 주창한 중화민족 부흥의 ‘중궈멍(中國夢)’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톈안먼 사건은 중국 내에서 재평가되기 쉽지 않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한 중국 연구자는 “중국에서 정치 개혁이 본격화하지 않는 한 재평가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영남 교수는 “톈안먼 무력 진압은 중국 개혁기에 공산당이 범한 최대의 정치적 오류이자 덩샤오핑이 범한 최대의 잘못된 결정”이라며 “톈안먼 사건은 언젠가 반드시 재평가돼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 김충남 특파원 utopian21@munhwa.com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