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고택 수졸당의 종부가 정갈하게 차려낸 내림음식상. 건진국수에다 명태찜, 고추부각, 북어 보푸라기 등을 찬으로 내놓았다.
경북 안동의 고택 수졸당의 종부가 정갈하게 차려낸 내림음식상. 건진국수에다 명태찜, 고추부각, 북어 보푸라기 등을 찬으로 내놓았다.

안동 다섯 고택의 내림음식 - (3) 수졸당(守拙堂)

- 심심하고 섬세한 ‘건진국수’
유둣날 지내는 제사 대표 음식
밀가루 콩가루 반죽 얇게 밀고
삶은 뒤 찬물로 헹구고 건져내
쇠고기볶음·호박채·깨소금 등
섬세한 재료의 맛 그대로 살려

- 이육사 가문의 ‘264 와인’
집안 어른 詩人 이육사 이름 따
3년전부터 종부가 포도밭 일궈
당도에 따라 3가지 종류의 와인
땅콩정과 · 깨강정 등 주안상도


안동의 다섯 고택 중 이전 방문지였던 칠계재와 정재종택 방문 이후 주위의 몇몇 지인들로부터 경북 안동 고택 체험과 관련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칠계재의 아침 식사와 정재종택의 과수원을 경험했다는 지인들도 있었고 송화주를 만들어 봤다는 전통주 애호가도 있었다. 사는 모습들은 다 다르지만 그동안 목말랐던 우리 전통에 대한 욕구들을 많은 사람은 여행을 통해 배우고 승화하고 있었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은 성장한다. 지금 길 위에 있는 나도 그렇다. 안동의 고택 체험을 통해 시대를 잇는 또 다른 내림음식을 알아보기 위해 도산면에 위치한 수졸당(守拙堂)으로 떠난다. 400년 넘은 고택 수졸당은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을 1대로 하는 진성(眞城) 이씨의 작은 종가로 그의 아들 수졸당 이기(李技, 1591∼1654)의 호를 따서 지은 종택이다. 원래는 안동시 예안면(지금의 안동댐 위치)에 있었으나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안동역에 내려 교보빌딩 앞 버스정류장에서 567번을 이용해 수졸당이 위치한 도산면 하계리에 도착했다.

안동 도산면 일대는 퇴계 이황을 계승하는 후손들의 마을답게 학문에 정진해 조선시대 때는 과거를 통해 벼슬을 얻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던 동네다.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이육사는 이곳에서 ‘청포도’와 ‘광야’ 같은 시를 낳기도 했다. 수졸당의 윤은숙 종부를 만났다. 그녀 역시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일찍이 한문을 익혔고 다양한 서책과 친하게 지냈다. 결혼 후에는 한글로 시를 쓰고 가사를 짓는 능력이 출중해 안동에서는 내방가사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종부에게 수졸당의 내림음식에 대해 물었다.


수졸당의 종부 윤은숙 씨가 문중의 내림음식인 건진국수를 만들기 위해 밀대로 밀가루 반죽을 말고 있다.
수졸당의 종부 윤은숙 씨가 문중의 내림음식인 건진국수를 만들기 위해 밀대로 밀가루 반죽을 말고 있다.

# 내림음식 ‘건진국수’ 만들기

“수졸당의 제사 중 가장 유명한 제사는 유두절에 드리는 제사인 유두차사입니다. 이때 안동국수의 대표로 알려진 건진국수를 올립니다.” 종부는 결혼 후 50년 넘게 건진국수를 만들었고 수졸당에 시집오기 전 이미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가문의 시제사 상에도 올랐던 대표적인 내림음식이다. TV 다큐멘터리 ‘누들로드’가 전 세계에 방영된 이후 수졸당의 건진국수는 안동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다시 조명받게 됐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숙성된 반죽을 밀대를 이용해 얇게 밀어낸다. 반죽이 얼마나 얇은지 밀어낸 반죽에 신문지 글씨가 비칠 정도였다. 반죽을 미는 모습을 보면 주방 바닥에 놓였던 넓은 밀대받침과 긴 밀대가 건진국수 반죽을 밀기 위해 크기며 길이며 최적화된 것임을 금세 알게 된다. 가늘고 가지런히 또박또박 썰어낸 국수 면은 주방 건너 뜰 옆 가마솥으로 옮겨져 펄펄 끓는 물에 끓여내 찬물로 헹궈낸다. 그릇에 담고 미리 준비해 둔 꾸미 쇠고기볶음, 호박채볶음, 깨소금, 김 가루 등을 올려낸다.



# 건진국수에 곁들이는 명태찜

저녁상 찬으로 수졸당의 대표적 내림음식인 명태찜도 있었다. 명태를 잘 두드려 벌린 후 깨끗이 다듬어 밀가루와 치자 물을 섞어 곱게 색을 낸 후 당파(쪽파)와 석이버섯으로 장식한 후 쪄낸 음식이다. “수졸당에서는 손님이 방문하면 내림음식 건진국수와 함께 명태찜을 꼭 냅니다.” 찬으로는 고추부각, 더덕구이, 배추전, 김장아찌, 북어 보푸라기, 돼지고기 수육 등이 나왔는데 부드럽고 심심한 건진국수와 명태찜과도 잘 어울렸다. 진한 양념 맛을 싫어하는 편식 성향이 있는 나에게 음식은 딱 맞았다. 안동 음식을 맛본 후 왜 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담백한 정도는 제사 음식과 거의 비슷했고 섬세한 재료 맛이 입안에서 잘 전해졌다.

건진국수 한 상으로 식사를 마친 후 식사 장소였던 종택 대청마루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래된 액자며 그림, 큰 병풍 등을 자세히 보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나이가 100년 미만인 것은 사람뿐인 것 같았다. 옛날 이 가문의 여러 어르신과 대청에서 함께 건진국수를 즐긴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내림음식이 갖고 있는 시대와 공간을 잇는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 이육사의 청포도 vs 264 와인

식사 후 동네 한 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 전기 자동차를 운전하는 종부를 만났다. 인근 포도밭에 간다 해서 무조건 올라탔다. 포도밭은 두 곳. 수졸당 앞에서 원천으로 가는 언덕길로 올라가다 왼편으로 작은 크기 하나, 그리고 독립기념비 넘어 조금 가다 왼편에 또 하나 있었다. 이 집안의 시인 이육사의 이름을 딴 264 와인을 만드는 포도밭이다. “농사는 지어 본 적 없지만 안동시 제안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직 한 포기도 죽이지 않고 반듯이 잘 가꾸고 있어 주변에서 칭찬 많이 받았어요.” 포도밭에서 일하는 종부의 모습을 접하니 내가 몇 년 전 만났던 유럽의 유명 와이너리 여사장의 위풍당당한 분위기와 묘하게 오버랩됐다. 멋진 모습이었다. “와인 밭을 일군 지는 3년째입니다. 이육사 님과 같은 가문의 종부로 이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투숙객들에게 와인 밭도 보여주고, 시음 및 체험도 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아직 준비단계입니다.” 미소를 머금은 종부의 꿈은 원대했다.


# 종부의 글·그림,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

포도밭에서 다시 수졸당으로 돌아와 그녀의 가사 작품을 만났다. 대청에서 보았던 서예 작품들도 종부의 것이다. 1회 종가 포럼 때는 서예 작품을 전시했고 식전행사에서 ‘종부의 삶’이란 휘호 퍼포먼스를 진행한 주인공이었다. 국내의 수많은 내방가사 경창대회 수상을 비롯해 이제는 국전 당선으로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고와당(古瓦堂)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작품을 많이 만든다. 종부의 예술인으로서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종부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답했다. 힘겨움이 느껴질 때마다 가사를 썼고 집안 대소사 때마다 마음을 담아 글로 적었단다. 특히 자식의 혼례 때 사돈에게 사위에게 며느리에게 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지금도 가끔 ‘며느리 부탁서’의 이름으로 며느리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고 있다.

강태안 미식여행가
강태안 미식여행가
“시집왔던 50여 년 전은 댐 건설로 종택이 하계리로 이주한 직후였습니다. 이미 독립운동으로 가세가 기울었던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일은 내 몫이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시동생이 내려왔지만 살림이 너무 어려워 종가에서는 잘 만들지 않은 값싼 허드레 음식인 ‘장 지짐’을 구우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하지만 마을에 알려진 장 지짐에 얽힌 미담을 믿기로 했어요. 과거 보러 갈 때 장 지짐을 구워 전대에 싸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인데 아들은 그때 장원급제해 금의환향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가 너무 미안해 혹시나 서운해했을까 가끔 확인 차 다시 묻는다. 시동생의 대답은 한결같다. “형수님, 그때 그 장 지짐 너무 맛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서로 배려하고 최선을 다했던 시절의 기억이다.


# 와인과 종가의 주안상을 경험한다

요즘 길어진 하루의 해는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수졸당 인근도 산책하고 시인 이육사를 기리는 포도밭도 둘러보고 종부와 내방가사도 공부해 보니 하루가 참 알찼다. 저녁이 깊어질 무렵 소반상이 방으로 전달됐다. 낮에 방문했던 포도밭의 주인공 264 와인이었다. 아직 출시 전이다. 출시되면 송화다식, 땅콩정과, 검은 깨강정 등과 함께 주안상으로 손님들께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264 와인은 당도에 따라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니 와인 애호가들은 와인 스타일을 종부에게 잘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시인 이육사를 기리는 와인과 종가의 솜씨를 느낄 수 있는 안주를 곁들이며 수졸당의 밤은 깊어갔다.

수졸당의 종부는 “종부의 삶을 이해해야 종가의 음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종부의 삶이란 ‘섬김과 인내’로 요약할 수 있다. 종가에서 목격한 종부의 삶은 종가의 살림을 이끄는 ‘경제 전문가’, 조상의 뜻을 받들어 지키는 ‘전통 수호자’, 문중의 살림을 지켜 나가며 나눔을 실천하는 ‘선한 행동가’이며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킬 줄 아는 ‘예술가’였다. 아무나 될 수 없고 누구나 할 수 없다. 윤은숙 종부는 언젠가 스스로 남기려 하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이 감수성 넘치는 예술가로, 외유내강 경영자로서 살았다고 적고 싶다고 했다. 한 가문의 종부이자 내림음식의 전수자로, 내방가사의 문인으로, 포도밭을 가꾸는 농부로 바쁘게 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조상님의 은덕과 인내의 결실’이었다.

강태안 미식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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