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 궁전
광고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는 맥스(제임스 스페이더)는 얼마 전 아내 제이니를 잃고 낙도 없는 인생을 꾸역꾸역 살고 있는 가련한 청년이다. 그는 억지로 끌려가게 된 총각파티에 사 가지고 간 햄버거가 몇 개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만류하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햄버거 가게 ‘화이트 팰리스’로 다시 향한다. 중년의 여자 점원 노라(수전 서랜던)의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맥스는 화를 내며 결국 모자라는 햄버거 수만큼의 돈을 받아낸다. 파티에 돌아가지만 어디에도 끼고 싶지 않은 그는 동네 허름한 술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조금 전 그와 실랑이를 벌였던 노라가 술에 취해 바에 반쯤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노라는 엉거주춤 맥주잔을 비우고 있는 맥스에게 다가와 그의 허벅지를 주물러댄다.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주정을 부리던 노라는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섞어 자신은 어린 아들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맥스에게 노라는 온갖 교태를 부려 결국 그를 집으로 데려오고 맥스는 술에 취한 몸을 가누지 못해 노라의 소파에서 잠이 들고 만다.
이튿날 아침, 눈을 반쯤 뜬 맥스 앞에 노라가 다가온다. 그는 잠이 깨지도 않은 맥스 앞에 앉아 오럴섹스를 하기 시작한다. 낯선 쾌감에, 그리고 참아왔던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맥스는 노라에게 몸을 맡기고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그렇게 이뤄진 괴상한 첫 만남 이후로 맥스는 노라가 미칠 듯이 그리워진다. 퇴근 후 햄버거 가게 앞에서 노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맥스는 결국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을 때 노라는 기다렸다는 듯 맥스를 방으로 데려간다. 그 이후로 며칠간 별반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이불 속에서만 뒹굴던 두 사람은 서로가 잃은 상대의 빈자리를, 그 시간과 상처를 보상받는다.

루이스 만도키 감독의 1990년 작 ‘하얀 궁전’(사진)은 중년의 여자와 젊은 청년의 섹스로 시작된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와 설정들로 중반부까지 전개된다. 그러나 노라와 맥스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갈등을 빚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보인다. 가령, 소극적인 맥스가 친구들과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노라를 상류층 모임에 데려가는 대목에서 영화는 노라의 처량 맞은 신파로 에피소드를 꾸려 가는 것이 아닌 당찬 노라의 뒤에 숨어 있는 맥스에게 초점을 맞춘다. 둘의 관계를 둘러싼 질문세례에 주눅 드는 것은 노라가 아닌, 그가 실수할까 봐 불안한 맥스다. 가난한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는 부자 남자라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서사가 완전히 전복되는 순간이다. 맥스의 파티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노라지만, 자신의 편에 서주지 못한 맥스에게 그는 실망하고 뉴욕으로 떠나버린다.
시간이 흘러 이들의 로맨스도 과거의 불장난 정도로 남게 될 즈음,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노라의 눈앞에 맥스가 나타난다. 광고회사도, 잘난 친구들도 버리고 노라 앞에 나타난 맥스는 노라를 테이블에 눕혀 키스한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박수로 바뀌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얼굴이 벌게진 제임스 스페이더가 수전 서랜던의 얼굴을 코트로 덮고 식당 한가운데서 나누는 이 키스 신은 1990년대를 장식했던 로맨스 영화 중 단연 최고의 장면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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