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6년 전 정년 60세 법제화할 때
안전장치 빠뜨려 후유증 치러
文정부가 다시 꺼낸 정년연장

임금·고용 유연성 말하지만
민노총 기득권 넘어야 하는 일
정년이 무의미한 체제로 가야


지금은 휴지통에 들어갔지만,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에는 꽤 의미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고소득 근로자들의 임금인상을 자제해 청년 채용 등에 쓰고, 직무·숙련 등을 기준으로 한 임금체계 개편을 노사 자율로 추진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이 김동만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과 독대한 막판 협상 자리에서 깜짝 제안을 했다고 한다. “정년을 폐지할 테니 연봉제를 받으라”는 것이다. 사용자 대표가 정년을 연장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애겠다고 했으니 파격이다. 성사까지 바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겠지만, 그 안에는 정년 문제의 핵심이 들어 있다. 연공급(年功給) 등 현행 임금체계를 바꾸면 정년에 굳이 목매지 않아도 될 상황으로 이끌 수 있다는 얘기다. 합의문에 ‘임금체계 개편’ 표현이 들어간 것은 협상에 참여한 한국노총도 일정 부분 공감했다는 뜻이다.

정년을 60세로 법으로 못 박은 것이 2013년, 시행에 들어간 게 2016년이다. 과정은 졸속이었다. 2012년 여당이던 새누리당 대표는 정년 60세 법제화를 약속했고,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대선이 있던 해에 여야가 경쟁하듯 불을 지폈다. 그리고 이듬해 여야는 충분한 논의도 없이 덜컥 합의했고, 임금피크제란 안전장치가 빠진 ‘개문발차’로 이후 숱한 노사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다. 그렇게 정년이 60세가 된 지 불과 3년인데,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돌연 “정년연장을 사회적으로 논의할 시점”이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저성장, 소득·고용 참사, 추경 등 현안에 허덕이는 경제부총리의 발언치곤 생뚱맞지만, 중장기 미래를 위해선 간과할 수 없는 의제이긴 하다. 국가 인적자원의 활용 문제다.

60세 이상을 일터에 붙드는 건 세계적 흐름이다. 신체 나이로는 60대는 물론, 70대 노동도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독일·네덜란드 등 유럽국가는 65세 정년이 많은데, 67세쯤으로 늘리는 기류다. 미국·영국은 진작 정년제 자체를 폐지했다. 나이 차별을 금지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유럽의 근로자들에게 정년 연장은 축복이 아닌 굴레에 가깝다. 노후에 연금을 받으며 쉴 권리가 미뤄지는 것이다. 일자리 보장보다 연금재정 보전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고용 문화가 유사한 일본이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본은 한국보다 5년을 앞서간다. ‘65세 정년’을 2013년 정하고 2016년 시행했다. 한국이 추가 정년 연장을 거론하는 지금 70세 정년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법정 정년은 아직 60세다. 개별 기업이 정년 연장, 정년 폐지, 계속 고용 등 3가지 중 골라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일선 기업이 택한 건 각각 18% 대 3% 대 79%로 정년 연장을 선택한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향후 10년간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빠져나간 자리를 10대가 메우지 못하면서 매년 30만∼40만 명씩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다. 그러잖아도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꼴찌권이다. 활용 가능한 고령 인력을 내치면 성장 잠재력은 빠르게 꺾일 것이다. 고학력의 숙련된 노동력을 노동시장에 유지하는 건 필수 과제지만, 정년 연장은 국내에서도 축복이 되기 어렵다. 퇴직을 앞둔 근로자는 입사 10년 내 근로자보다 3배의 급여를 받지만, 생산성은 60%에 그친다. 이런 구조에서 정년을 또다시 법으로 늘리면, 기업 인건비는 급증하고 생산성은 외려 떨어진다. 젊은 피를 수혈할 여력도 없어진다.

답은 나와 있고, 문재인 정부도 알고 있다. 홍 부총리는 정년 연장의 전제로 “연공서열형 임금 구조와 경직된 고용형태 개선”을 거론했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노동개혁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기존 근로자의 임금을 깎는 일이고, 노조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이다. ‘100만 대군 민노총’이 무소불위 권력으로 호령하는 세상이다. 문 정부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정부 내에서 ‘사회적 합의’란 말이 흘러나온다. 혹여 정년연장 이슈로 40대 이상 유권자의 환심을 사면서, 정작 중요한 전제는 합의를 핑계로 미룰 생각이라면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고령자가 특정 직장이 아니라 고용시장에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고용·임금 경직성을 깨고, 경제성장으로 고용 여력을 키우고, 기업에 선택권을 주면 정년 집착도 점차 시들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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