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포티’의 한 장면. 카포티(필립 시모어 호프먼·왼쪽)는 어디서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청중을 사로잡았지만 평생 외로움과 싸우며 집필해야 했다.
영화 ‘카포티’의 한 장면. 카포티(필립 시모어 호프먼·왼쪽)는 어디서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청중을 사로잡았지만 평생 외로움과 싸우며 집필해야 했다.
카포티는 사형을 앞둔 페리(왼쪽)와 딕의 면회를 가서 페리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카포티는 사형을 앞둔 페리(왼쪽)와 딕의 면회를 가서 페리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 윤성은의 스크린 인물학 - ⑫ ‘카포티’속 주인공 트루먼 카포티

카포티 ‘티파니…’ 로 성공뒤
‘인 콜드…’ 쓰던 시기 영화화

클러터 일가족 살인사건 소재
사실과 허구 결합 소설로 가공

범인들의 관점까지 삽입시켜
사건 생생하게 묘사한 것인가
범죄자에 대한 연민인가 논란

실제 카포티도 모순적 삶 살아
‘인 콜드…’ 집필때 몰입‘과도’
살 20파운드·치아 4개 빠져
알코올의존증에 신작 끝내못써


뉴욕 맨해튼 5번 애비뉴의 새벽, 노란 택시에서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내린다. 밤새 파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 그 여성은 티파니 매장 쇼윈도 앞에서 빵과 커피로 아침을 해결한 후 집으로 들어간다. 복합적인 매력을 가진 파티걸 홀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와 함께 저 유명한 노래 ‘문 리버’(헨리 맨시니)가 처음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장면은 원작자인 트루먼 카포티의 머릿속에서 먼저 창조됐다. 그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첫 장편 ‘다른 목소리, 다른 방’(Other Voices, Other Rooms·1948)이 카포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쓴 것과 마찬가지로 홀리 골라이틀리도 사치스럽고 남성 편력이 심했던 미모의 어머니를 비롯해 당시 친하게 지냈던 여러 사교계 인사로부터 영감을 얻어 완성된 인물이다. 전작들보다 수사를 줄이고 차분한 문체를 사용한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58)은 수많은 뉴욕 여성이 자기가 실제 모델이라고 주장했을 만큼 성공적이었고, 영화의 인기는 그 이상이었다.

영화 ‘카포티’의 실제 주인공인 미국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
영화 ‘카포티’의 실제 주인공인 미국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후 더 큰 부와 명성을 얻게 된 이듬해 11월, 카포티는 신문을 읽다가 자신의 문학세계에 정점을 찍게 될, 그러나 그 대가로 영혼을 저당 잡히게 될 작품을 구상한다. 캔자스 서부의 홀컴마을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사건이 그의 본능을 강하게 자극한 것이다. 카포티는 당장 소꿉친구이자 훗날 ‘앵무새 죽이기’(1960)로 퓰리처상을 받게 되는 작가 하퍼 리와 취재 여행을 떠나게 되고, 드디어 그가 20년 동안이나 관심을 갖고 있었던 새로운 장르인 논픽션 소설을 쓰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거나 주변 인물들을 모델로 삼아 쓴 소설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었으며 일전에 말런 브랜도와의 인터뷰를 문학적 스타일을 가미해 기록한 ‘더 듀크 인 히즈 도메인’(The Duke in His Domain)과도 차별화된 성격의 글이었다. 그가 무려 6년에 걸쳐 집필한 논픽션 소설 ‘인 콜드 블러드’(1966)는 500만 부나 팔렸을 뿐 아니라 미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남게 됐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마찬가지로 카포티를 미국 문학사의 지형도를 바꿔 놓은 작가로 격상시켰다.

이 작품은 먼저, 살해당한 클러터 일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상세히 소개한다. 클러터는 지역 유지이자 명망이 높았던 인물로, 남의 원한을 살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음이 그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난다. 아내 보니는 몸이 좋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동정을 사고 있었고, 출가했거나 독립한 두 딸 외에 그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가 된 딸 낸시와 아들 케니언도 모두 착하고 재능 있는 아이들이었다. 한편, 이들을 살해하게 되는 두 남자는 최소 1만 달러의 현금이 든 금고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만반의 준비를 한 후 클러터의 집을 급습한다. 그러나 그들은 겨우 40∼50달러밖에 챙기지 못하고 네 사람을 살해한 채 도주해 버린다. 카포티는 마을 사람들과 범죄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사실에 기반해 있음에도 범죄 현장의 풍경 및 분위기, 심리 묘사는 여느 소설에 사용되는 문장처럼 문학적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단락은 이 사건의 끔찍함을 날카롭고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그날 아침, 일요일 아침 아주 이른 그 시간에, 어떤 낯선 소리가 홀컴의 밤에 흔히 들리는 소음, 즉 코요테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울음소리, 말라비틀어진 잡초 더미가 스윽스윽 굴러가는 소리,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중략)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던 마을 주민들은 환청처럼 그 소리를 자꾸 되살려냈다. 그 음울한 총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의 불길을 지펴 오랜 이웃이던 사람들은 서로를 낯선 눈길로, 이방인으로서 바라보게 되었다.”(‘인 콜드 블러드’·시공사·16p)


즉, 재료는 논픽션이지만, 그것을 가공하는 방식은 소설이다.


베넷 밀러 감독의 ‘카포티’(2005)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던 시기의 트루먼 카포티를 주인공으로 만든 작품으로, 담대하고 직설적으로 시작된다. 한 소녀가 고요한 농가에서 친구의 시체를 발견하는 오프닝 신 다음, 한 파티에서 카포티는 자신을 둘러싼 청중에게 작가가 가져야 할 ‘정직함’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댄다. 모든 것에 정직할 필요는 없지만 목표만큼은 정직해야 한다는 작가로서 그의 가치관은 그가 취재를 위해 홀컴으로 떠나게 되면서 바로 시험대에 오른다. 본래 그는 이 사건의 끔찍한 면모와 평화로웠던 작은 마을에 불러일으킨 파장에 대해서만 다루려고 했지만, 범인들(페리 에드워드 스미스, 딕 히콕)을 만난 후에는 그들의 시점까지 삽입시키며 르포르타주를 넘어선 소설을 써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목적은 클러터 가족 살인사건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범인들에게 일말의 인간적인 이해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 그 자체에 있는가.

밀러 감독은 스스로 이러한 쟁점을 중심에 놓고, 논픽션 소설과 그 작가에 대한 논픽션 극영화를 만들고자 결심한 것 같다. 그는 클러터 가족 살인사건이라는 실화와 그것을 재구성한 ‘인 콜드 블러드’에 카포티의 인터뷰 자료, 자서전까지 덧붙여 한 단계 더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페리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는 카포티, 사건 당일의 진실을 캐내기 위해 집요하게 페리를 추궁하는 카포티, 그리고 페리의 죽음 앞에 괴로워하는 카포티의 모습을 담고 있다. 논픽션 소설이라는 형용 모순에 빠진 용어를 ‘역사적 인물과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소설의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써내려간 문학의 한 장르’로 규정할 때, ‘카포티’는 정확히 그것의 영화판이라고 할 만하다. 밀러 감독의 이러한 실험은 200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 5개 부문 후보에 오를 만큼 호응을 얻었다. 특히, 영화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카포티 역의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당당히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키가 160㎝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카포티보다 체격은 훨씬 컸지만, 특유의 소년 같은 표정이나 하이톤의 여성스러운 목소리, 독특한 말투는 이 놀라운 배우에 의해 그대로 재현됐다. 밀러 감독은 이후에도 실존 인물과 사건을 다룬 ‘머니볼’(2011)과 ‘폭스 캐처’(2014)를 연출하며 자신의 특기와 관심사를 이어간다. 거의 마지막까지 큰 사건 없이 인물의 심리만을 조용히 묘사하며 서스펜스를 증폭시키는 ‘폭스 캐처’는 카포티가 그토록 집착했던 사건의 전말보다 범죄자와의 관계 위주로 전개되는 ‘카포티’의 스토리텔링과 닮아 있다.


‘카포티’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카포티가 논픽션 소설이라는 용어처럼 모순적인 인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물론, 카포티의 실제 삶과도 관련이 있다. 부모의 이혼으로 네 살 때부터 친척 집을 오가며 살았던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타인보다 월등한 지각 능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력이 무척 뛰어나서 읽거나 들은 이야기의 95% 정도는 그대로 뱉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높은 아이큐와 대조적으로 학교 성적은 좋지 못해 주목받는 학생은 아니었다.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후 그는 미완성 유작이 된 ‘응답받은 기도’(Answered Prayer)를 집필하기 전까지 사교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지만 ‘다른 목소리, 다른 방’에서 느껴지는 음울함이 그의 기본적인 정서였고, 평생 외로움과 싸우며 집필 활동을 해야 했다. ‘카포티’는 의도적으로 그가 파티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로 청중을 사로잡는 장면과 살인마인 페리와 교감하는 장면, 혼자서 괴로워하는 장면을 번갈아 삽입시킨다. 또한, 자기가 유리한 대로 말을 바꾸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페리에게 ‘인 콜드 블러드’라는 책 제목에 대해 해명할 때는 관객들까지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진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페리와 딕이 변호사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음에도 그들이 정말 집행유예를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 역시 모순적이다.

다만, 페리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끼며, 죽음을 마음 아파하는 모습에서는 진정성이 엿보인다. 카포티는 살해당한 클러터 일가에게만큼이나 페리에게도 깊은 연민을 갖고 있었으며 생전에 그런 그의 감정을 솔직하게 피력한 바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인 콜드 블러드’의 세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 침울한 기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카포티가 6년간의 집필을 끝냈을 때, 몸무게는 20파운드나 줄었고 치아는 네 개나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후 한 권의 장편소설도 완성시키지 못했으며, 1984년에 알코올의존증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카포티가 만약 순수창작 소설을 썼더라면 이런 비극을 맞이했을까. 결과적으로 그는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결합시키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데 목숨을 걸었던 셈이다. 자신이 믿었던 예술적 비전의 순교자로서 카포티의 혼이 담겨 있기에, ‘인 콜드 블러드’의 한 문장, 한 문장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