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대일본주의’의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방한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울 연세대에서 ‘한반도의 신시대와 동아시아의 공생’을 주제로 초청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탈대일본주의’의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방한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울 연세대에서 ‘한반도의 신시대와 동아시아의 공생’을 주제로 초청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탈대일본주의 / 하토야마 유키오 지음, 김화영 옮김 / 중앙북스

獨처럼 과거 관련 철저한 사죄
美·中 사이 국익 줄타기는 그만

중규모國 ‘미들파워’인정하고
韓·中과 협력의 길 먼저 열어야

미래는 ‘평화와 질서’의 시대
밖으로는 협력, 안으로는 분배
공존 통해 생존 방향 모색해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友紀夫) 전 일본 총리(재임 기간 2009.9~2010.6)는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진보적 자유주의자면서 한국은 물론 중국에도 우호적인 정치인이다. 우리에게 그가 각인된 건 총리 때보다 2015년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무릎 꿇고 사죄했던 ‘사건’일 것이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은 장면과 오버랩됐다. 브란트의 사죄는 이후 동서 화해 모드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평가받았고 독일 통일로 이어졌다. 하토야마 전 총리가 ‘탈대일본주의’(脫大日本主義)에서 제안하는 구상도 일본이 독일처럼 철저한 사죄를 통해 대국주의의 헛된 욕망을 포기하고, ‘미들 파워’(중규모 국가·中規模 國家)로써 한국·중국과 협력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길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부제목처럼, “‘성숙한 시대’를 위한 국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이번 주 방한했고, 강연과 출판기념회, 예정에 없던 고 이희호 여사 조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그가 이번 방한 중 강연에서 재차 밝힌 “일본이 ‘위안부’ 사과를 계속해야 한다”든지,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시대착오”라는 등의 발언은 그의 소신이었고 책에도 나온다. 재작년에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은 소장 정치학자 나카지마 다케시(中島岳志)가 쓴 장문의 서평을 실었다. 까다로운 논객인 나카지마는 ‘동아시아와 협력하는 중규모국가로’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하토야마 내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이념까지 전체가 부정되는 것은 좋지 않다. 미래를 향한 유효한 구상과 정책이 많이 포함돼 있다. 지금이야말로 읽어야 할 책이다”라고 호평했다.

하토야마는 2013년에 유키오(由紀夫)에서 유키오(友紀夫)로 개명(改名)했다. 그의 조부인 이치로(一郞) 총리가 당시 공산당 등 마르크스 세력의 공세에 맞서 건전한 의회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는 이념체계로 제시한 우애(友愛)에서 바꾼 이름을 따온 것이다. 우애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 중 하나인 ‘박애’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하토야마는 이를 ‘자립과 공생’으로 연결 짓는다. 자립과 공생의 정신은 전후 일본 보수정당에서 계속 이어져 왔으나, 냉전 후 미·일 동맹을 절대시하면서 나머지 세계는 눈에 들어오지 않게 돼 버리며 일본 정치와 언론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의 수장을 경험한 하토야마는 일본뿐 아니라 그와 밀접한 한국의 미래, 미·중이라는 슈퍼 파워의 충돌이라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적지 않은 시사를 준다. 그는 “금세기 일본은 중규모 국가화가 숙명”이라며 “그걸 피할 수 없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중규모 국가로 살아갈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메이지 시대 이후 대일본주의의 지향은 패전 이후에 ‘경제대국에서 정치대국으로’의 형태로 지속돼 왔는데, 중국을 비롯한 신흥 대국의 부상, 인구감소와 저성장 경제의 고착, 정치대국의 상징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점 등에서 보이듯, 대일본주의가 아니라 탈(脫) 대일본주의의 국가구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탈대일본주의는 오히려 일본의 정치와 경제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것이라고 전망한다. 밖으로는 동아시아와의 협력에 힘쓰고, 안으로는 저성장 경제 체제에서 새로운 분배 정책을 실현하는 성숙한 국가로서 새로운 국가 모델을 세계 앞에 만들면, 외교적 측면에서도 전후 처음으로 세계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같은 국가적 변화 하에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토야먀는 보았다. ‘동아시아 공동체’라 하면 과거 군국주의 시대의 ‘대동아공영권’이 떠올라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는 섬뜩하다. 탈대일본주의의 선언과 실천은 이를 완화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 미국에,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는 일본과 한국, 호주, 필리핀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은 미·중 사이에서 어떻게 유연하게 정치적·경제적 자립을 유지하면서 국익을 지켜나갈지를 고민한다. 하토야마는 동아시아에 다국(多國) 간 안정 보장의 틀을 만듦으로써 긴장이 완화되고, 지역 패권주의 국가들의 행동 또한 신중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포함한 중규모 국가들이 ‘팍스 아메리카’도 ‘팍스 차이나’도 아닌 ‘팍스 아시아나’가 돼 자립과 평화질서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도 20권이 넘는 책이 번역된,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內田樹)가 책의 말미에 쓴 짧지 않은 해설 ‘어색한 공존의 시대’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인간적 면모(우치다는 “확실히 좋은 사람”이라고 평한다)와 함께, 책의 본문을 안 읽어도 될 만큼, ‘우애’를 바탕으로 하는 ‘동아시아 공동체’가 왜 유일한 공존의 미래인지, 왜 일본은 결국엔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를 요약해준다. 280쪽, 1만2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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