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 조제 조르즈 레트리아 글, 안드레 레트리아 그림, 엄혜숙 옮김 / 그림책공작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순간이지만 전쟁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증오의 감정은 전쟁으로 분출되기 직전까지 의외로 침착해서 누구에게도 쉽게 들키지 않는다. 전쟁이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은 적이 아니라 전쟁을 겪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집요한 바이러스의 숙주가 돼 전쟁의 의도를 대신 실행하다가 사라진다. 살아있다면 모두 전쟁의 표적이 된다.

‘전쟁’은 전쟁의 잔혹한 본성을 파헤친 그림책이지만 책에는 단 한 번도 핏빛이 비치지 않는다. 묵직한 무채색이 슬금슬금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 뿐이다. 작가는 붓을 들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고 흐물흐물한 검은 선을 그린다. 그 탁한 선은 틈새가 보일 때마다 진격하고 뒤따라 탐욕스러운 벌레들이 기어오른다. 위험을 감지한 새는 먼저 달아난다. 높은 계급장을 단 장군은 자신이 이 검은 선과 벌레에게 감염됐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화려한 진군 계획을 세운다. 혼자서만 방독면을 쓰고 절벽 끝에 서서 뒷짐을 진 채 공격을 지시한다.

자신의 손에는 아무것도 묻히지 않으며 병사를 내보내고 전투기를 출격시키고 포탄을 투하하면서 영광을 꿈꾸고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손짓은 전쟁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만다. 최후의 승자는 전쟁이다.

이 책의 책장을 끝까지 넘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무고한 작은 생명들이 어떻게 영문을 모르고 전쟁의 희생자가 되는지 깨닫게 된다.

작가 안드레 레트리아는 처음에 글 없는 그림책으로 기획하고 작업을 시작했으나 작가인 아버지 조제 조르즈와 대화를 나누면서 전쟁의 본질을 알리는 짤막한 문장을 함께 싣기로 한다. 그 구절들은 하나하나 통렬하다.

가장 먹먹한 문장은 “전쟁은 어떤 이야기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이 장면에서 장군은 산더미처럼 쌓인 책 위로 불씨를 내던진다. 이야기를 잃은 세계는 어떤 불의에 짓밟혀도 침묵하게 된다. “전쟁은 차갑고 그늘진 아이를 만들어낸다”는 구절도 가슴을 찌르는 대목이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총을 들게 되며 “죽음의 궁극적인 은신처”인 전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된다. 64쪽, 1만5000원.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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