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생활세계에서 살기를 원한다.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설정한 ‘체제(System)’와 ‘생활세계(Lebenswelt)’간 상관관계의 틀을 작금의 한반도 상황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체제에는 개인과 집단 또는 국가 등이 속하며, 생활세계는 이를 둘러싼 환경을 뜻한다.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생활세계를 온전히 자신의 의도대로 견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 반대로 생활세계가 체제를 압도하는 경우, 후자는 전자에 지혜롭게 적응해야만 자신의 존재가 담보된다. 실패하는 경우 체제는 소멸로 이어진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결과 북한 논리가 그대로 수용됐고, 핵보유국 지위를 잠정적으로 인정할지도 모른다는 미국에 대한 신뢰 위기가 드러났다. 반면, 지난 2월 하노이회담에서 김정은이 허를 찔리면서 노딜로 끝났다. 하노이회담에서 어떠한 합의라도 도출되면 싱가포르 회담을 인정하는 결과로 간주되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을 깨뜨리려는 의도 속에 일체의 유연성을 배제했다. 이후 잠시 소강 상태를 거치다가 최근 김정은과 트럼프는 서로 우호적 친서를 교환했다고 확인했다.
28∼29일의 일본 오사카 G20 회의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게다가 2년 전 트럼프 방한 때 기상 악화로 취소했던 비무장지대(DMZ) 방문 가능성이 커 보인다. 우호적 친서 교환 이후 방한 기간에 트럼프가 DMZ에서 강력한 비핵화 의지를 천명하는 대신 김정은과 깜짝 만남이 이뤄진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생활세계’가 만들어진다. 물론 회담 유무와 결과를 예단할 순 없다.
김정은의 미·북 회담 목적은 핵보유국 인정이다. 하노이 회담 전까지 그의 핵 전략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김정은은 하노이 회담에서 노딜이라는 수모를 경험했다. 이번에 깜짝쇼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다면, 영변 지역 외에 2∼3군데 은폐된 핵 농축시설을 내놓고 핵·미사일 실험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할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가 재선을 염두에 둔 트럼프로 하여금 지구상 가장 위험한 화약고인 DMZ에서 적당한 타협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연출로 이어진다면, 대한민국 안보는 돌이키기 어려운 위험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체제’는 안정적으로 지속되기 어려운 안보 환경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8일 2년 후 재선을 위한 플로리다 출정식을 마쳤다. 따라서 이번 방한과 DMZ 방문 때 보여줄 정치적 공연 모두가 재선 전략과 연관되며, 지지층과 거꾸로 가는 모험을 시도할 가능성은 작다. 미국은 자국 이익 우선 원칙에서 한반도 정책을 결정한다. 미국의 안중에 한국은 없다. 이러한 상황은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에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위정자들에게, 냉철하고 지혜로운 판단과 결정을 요구한다.
동시에 지난 2년 동안 현 정부가 강조하는 평화와 대화 우선 원칙이 헌법 제66조2항에 규정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을 수호하는 최선의 전략임을 객관적으로 납득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 국민도 눈을 부릅뜨고,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불리한 ‘생활세계’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시대정신을 갖출 때다. 국가안보는 어떤 경우에도 방임이나 무임 승차로 담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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