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먼 짐승

1800년대 말 탄생한 영화는 TV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급상승한 1970년대 이전까지 독점적으로 오락수단을 담당했다. TV의 보급이 빠르게 진행됐던 미국을 제외한 많은 지역에서 1950년대는 영화의 황금기다. 일본 역시 이 시대에 일본 영화 사상 최고의 아티스트들을 배출해냈다.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와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등의 1세대 영화 장인들이 독트린에 가까운 정적이고 고전적인 영화를 만들어냈고,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과 오시마 나기사(大島渚)를 비롯한 새로운 주자들은 관습 파괴적인 영화에 집중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벨바그 운동이 일본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재패니즈 뉴웨이브’로 불렀고, 마스무라 야스조(增村保造)는 이 운동의 기수 격인 감독이다.

야스조 감독은 청년 시절 이탈리아로 가 페데리코 펠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등 거장들에게 직접 연출 트레이닝을 받은 보기 드문 인재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1957년 ‘입맞춤’으로 데뷔한 후 1969년 ‘눈먼 짐승’(사진)에 이르기까지 매년 두 편 이상의 수작을 내놨다. 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 중 후기 작품인 ‘눈먼 짐승’은 영화적 소재로도, 시각적 시도로도 눈에 띄는 작품이다.

아키(미도리 마코)는 자신이 모델을 했던 조각상을 보기 위해 갤러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한 시각장애인(후나코시 에이지)이 조각의 몸을 샅샅이 만지고 느끼는 것을 목격한다. 아키는 그가 자신의 몸을 더듬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 갤러리를 떠난다. 며칠 후 새벽까지 일하고 돌아온 아키는 집으로 마사지사를 부른다. 시각장애인 마사지사가 아키의 집에 도착하고 마사지를 시작한다. 그는 아키의 허벅지와 가슴을 주물러대며 그의 몸매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다. 아키는 며칠 전 갤러리에서 봤던 시각장애인을 떠올리며 마사지를 중단시킨다. 그를 돌려보내려는 순간, 마사지사는 아키의 얼굴에 마취제를 묻힌 헝겊을 씌우고 아키는 쓰러진다. 갤러리에서 봤던 시각장애인이 마사지사로 위장한 것이다. 아키가 눈을 뜬 곳은 창고를 개조한 거대한 밀실이다. 시각장애인이 ‘아틀리에’라고 부르는 이 공간에는 인간의 눈, 코를 형상화하거나 여성의 가슴, 다리 등을 오브제로 만든 조각상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조각가인 시각장애인은 여성의 몸을 조각하고 싶어 하지만 만져서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최근에 모델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아키를 납치한 것이다. 그의 계략이 성공하고, 결국 아키는 그의 작업장에 감금된다.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아키는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옷을 벗고 포즈를 취한다. 그는 아키의 팔다리를, 가슴과 엉덩이를 세심하고 탐욕스럽게 만지고 분석한 후 찰흙을 집어 들어 그만의 조각상을 빚는다.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한 줄거리와 인물 설정만으로도 기괴한 이 영화는 중간중간 인서트로 삽입되는 나체의 흑백사진들, 신체 일부분을 조각한 작품들의 클로즈업으로 그로테스크함을 더한다. 중반부까지 이토록 기괴한 설정들로 관객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서며 관객을 향한 고문을 시작한다.

시각장애인의 모델로서 시간을 보내던 아키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들은 조각을 그만두고 촉각만을 이용해 서로의 몸을 탐한다. 시각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아키도 그처럼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점점 쾌락의 나락에 빠진다. 깨물고 할퀴던 애정행각은 때리고 피를 내는 마조히즘적 섹스로 발전한다. 손과 촉각을 이용하던 이들은 조각칼을 이용해 상대의 팔, 다리를 베기에 이른다. 조금만 더 통증을 달라고 애원하던 아키는 숨을 거두고, 아키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자살한다. 피투성이 알몸의 남녀는 그렇게 거대한 여성의 사타구니 조각상 위에서 주검이 된다.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가학적 성행위와 그것이 발전하는 미세한 단계를 담아내는 후반부는 숨이 막힐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욕망을 배태하는 감각에 대한 경고이기도, 풍자이기도 하다. 느끼는 것은 보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행위라는 것을 야스조 감독은 눈먼 짐승들을 통해 ‘보라’고 말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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