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성신여대 교수 국제정치학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로 일본 기업의 자산이 매각돼 실질적 피해가 발생할 것이 확실시되자 ‘경제보복전쟁’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TV, 스마트폰 제조에 필수적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 포토레지스트(PR), 불화수소(HF·에칭가스) 3개 첨단 재료의 한국 수출 규제를 공표한 것이다. 하지만 한·일 양국 모두 이 전쟁의 패자로 역사에 기록돼선 안 된다.

이번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는 한·일 관계의 토대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일본이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끝나자마자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나선 것은 경제대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행동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일본의 경제보복에서 한국 정부가 자유로운 건 아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판결 이후 한·일 관계 전문가들은 한국의 단독 배상 부담, 한·일 동시 부담, 합의 없는 한·일 관계 파국이라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최소한 파국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그 8개월 동안 문재인 정부는 법원의 판결이기 때문에 정부로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이해할 수 없는 자세를 취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주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일본과 사전 협의도 하지 않고 한·일 기업 동시 부담이라는 방안을 허공에 던지다시피 제시했다. 하지만 일본은 즉시 이를 거부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문 정부의 방관자적 행태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일본이 문 정부의 한·일 공동 부담 방안을 거부한 것은 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위안부재단을 일방적으로 해체했기 때문이다. 외교는 상대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국의 의중을 무시하고 생색내기용으로 중차대한 외교적 현안을 다룬 문 정부의 외교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그동안 한·일 관계의 토대가 돼온 ‘1965년 체제’를 뒤흔드는 일이었다.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1965년 체제’ 이후 대안을 한국 측이 제시할 의무가 있다는 일본 정부와 전문가들의 주장이 설득력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는 한국 기업에 대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실질적으로 불러오고 한국민의 반일감정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철회돼야 한다.

최근 북한·중국·러시아 북방 3국의 연대가 급속히 강화되고 있다. 이와 달리 한·미·일 남방 3국의 협력 체제는 이번 징용재판 보복에서 보는 것처럼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한·일 관계의 파국은 북방 3국에 유리한 레드 카펫을 깔아주는 것일 뿐이다. 북핵 문제가 장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일 안보 협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과거사 문제를 두고 한·일 양국이 ‘경제보복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한·미·일 3국 어느 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교 정책의 핵심은 우선순위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이 점을 한·일 양국 정치지도자들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양국 관계의 파국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주역인 기업들은, 미·중 간 화웨이 문제와 최근 다시 노골화하는 중국의 사드(THAAD) 보복에 이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인해 ‘동네북 신세’가 되고 있다. 문 정부는 우리 기업이 누구에게 얻어맞든지 나 몰라라 하고 북한만 쳐다볼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 정치적·외교적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과거에 집착해 미래를 버려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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