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점에서 뉴욕타임스의 부고 기사는 마치 짧은 ‘평전’(評傳)처럼, 잘한 일은 칭찬해도 잘못한 일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 신랄함으로 유명합니다. 부고 기사가 신문의 신뢰도를 보여준다 할 정도로, 미국에선 전담 편집자와 필력이 뛰어난 기자를 두고 부고란을 운영합니다. ‘뉴욕타임스’나 ‘이코노미스트’의 부고 기사는 자주 책으로 엮어질 만큼 대접을 받습니다. 그 정도로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관심도 크다는 것이지요.
유명인의 경우 질환이나 노환으로 사망이 임박했을 때 우리 신문도 미리 기사를 작성해 놓습니다. 2011년 3월 23일 ‘세기의 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별칭 ‘리즈’)가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 온라인판은 CNN방송보다 빠르게 이 소식을 전 세계에 긴급 타전했고, 무려 4000단어, 신문 4쪽 분량의 리즈 부고 기사를 곧이어 올렸습니다. 기사를 쓴 이는 멜 거소 문화담당 기자였는데, 놀랍게도 그는 기사가 나기 6년 전인 2005년 4월 사망했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이 나중에 죽은 사람의 부고 기사를 쓴 셈이지요. 신문은 “멜 거소가 방대한 부고 기사를 이미 완성해 놓았고, 이를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고 발표했습니다. 부고 기사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를 알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이번 주 번역 출간된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Book of the Dead·윌리엄 맥도널드 편저, 인간희극)에도 멜 거소의 리즈 부고 기사가 6쪽에 걸쳐 들어 있습니다. 리즈의 어린 시절부터 배우로서의 경력, 리처드 버턴 등과 이혼을 거듭한 삶, 사치스럽고 격정적인 생활 등 한 편의 압축된 전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책은 뉴욕타임스가 1851년 9월 18일 창간호부터 2016년까지 165년간 보도한 부고 기사 중 정치·경제·문화계 거물 160여 명의 부고를 가려 뽑았습니다. 사실 이 신문의 긴 부고 기사에 올랐다면, 세상을 어느 정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레닌·스탈린·히틀러·처칠 같은 정치인, 마르크스·니체·아인슈타인 등 학자, 록펠러·포드·스티브 잡스 등 기업인, 채플린·존 레넌·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문화계 인사 등을 망라했습니다. 한국어 번역판엔 ‘한반도의 운명을 쥐었던 사람들’이라는 별도의 장에서 이승만·김일성·박정희·노무현·김대중·김정일의 부고 기사를 실었습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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