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가 전위된 정도를 신전과 굴곡 상태에서 각각 측정하였을 때.’
과연, 위 문장의 의미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 국민이라면 위 문장의 뜻을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위 문장은 놀랍게도 현재 시행 중인 산업재해 장애등급 판정과 관련된 규정이다. 이는 ‘척추가 어긋난 정도를 편 상태와 굽힌 상태에서 각각 측정하였을 때’로 쉽게 쓸 수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현행 법령의 문구만으로는 정작 산재를 입은 국민이 자신의 산재 등급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재 법령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가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다. 꽤 오래전부터 법은, 법 관련 전문가와 공무원들, 그리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로 누리고 사용하는 전문 영역이었다. 그러하기에 어려운 용어가 많이 포함돼 있어도 문제 될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현대사회는 국민 생활의 대부분이 법령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법령은 전문가나 공무원만의 영역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잘 알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법령의 어려운 용어들은 국민이 법을 쉽게 활용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지금처럼 법령이 계속 어렵다면 국민은 법령의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어 자신의 권리나 의무를 알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들여 전문가를 찾아가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법제처는 현행 법령을 전수 조사하고 그 속의 어려운 용어를 찾아내어 쉽게 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전문용어, 낯선 외국어나 한자어 등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어려운 법령 용어를 찾아 개선해 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1500여 용어에 대해 법령 소관 부처와 개정 협의를 마쳤다. 하지만 현행 법령 속의 어려운 용어를 찾아내어 쉽게 쓰는 것만으로는 법령을 국민 눈높이에 맞출 수 없다. 매년 수천 개의 법령이 새로 제정되거나 개정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전에 없던 어려운 용어들이 법령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비오톱’과 같은 용어다. 이는 그리스어로 생명을 의미하는 ‘비오스(bios)’와 땅을 의미하는 ‘토포스(topos)’가 결합된 용어로, 생명이 살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라는 뜻의 환경 분야 전문용어다. 그런데 법령문 초안에 이 용어가 포함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용어가 그대로 법령에 계속해서 들어온다면 법령 개선 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염려가 있다.
그래서 법제처는 어려운 용어가 법령이 되기 전에 미리 걸러내고 차단하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 중이다. 이는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비오톱’을, 일반 국민의 생활 언어로 쉽게 풀어 법령에 받아들이기 위한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이 직접 심사 과정에 참여했고, 그 의견을 반영해 한결 이해하기 쉬운 ‘생물서식공간’이라는 용어가 최종적으로 법령화됐다. 이와 같이 법제처는 법령 수요자인 국민이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 절차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법령안의 어려운 표현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각종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법제처와 국민과의 소통이 활발해질수록 법령과 국민 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국민의 알 권리 보장도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이 이해하기 쉽도록 법령을 바꾸는 것은 법제처의 힘만으로 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공무원과 전문가가 독점하던 법령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관계 부처는 물론 각계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민의 관심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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