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미국 주도로 지난 1985년 이뤄진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촉발한 단초였다. 당시 합의로 일본 엔화가 강제로 평가절상되면서 일본은 수출 급감→불황→경기진작을 위한 저금리 정책→주식·부동산 버블 형성→거품 붕괴에 따른 자산 디플레이션 등으로 이어지며 오랜 기간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시 엔화 가치 급등을 강제한 플라자 합의는 합의라는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r policy)’의 일환이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J V 로빈슨이 명명한 이 용어는 ‘상대방의 카드를 전부 빼앗아 온다’는 트럼프 용어를 빗댄 것으로, 타국의 희생 위에 자국의 번영이나 경기회복을 도모하려는 국제경제 정책을 통칭한다. 쉽게 말해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이다. 이 정책의 맹점은, 상대국에서도 참지 않고 맞대응을 하면서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점이다.
경제학 교과서에 있던 근린궁핍화정책을 21세기 글로벌 현장에 끌고 나온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중국 등 대미 흑자국들이 환율 조작을 통해 미국 돈을 빼앗아 간다’며 근린궁핍화 피해 의식에 휩싸여 있던 트럼프가 수입품 관세 부과라는 또 다른 형태의 근린궁핍화 수단을 꺼내 든 것. 미·중은 최근 휴전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환율전쟁으로 이어질 조짐이다.
때마침 일본이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경제 보복 일환으로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겨냥한 수출규제에 나선 것을 놓고 근린궁핍화정책의 또 다른 형태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아베 신조 정부의 엔저(低) 근린궁핍화정책으로 한국이 최대 피해를 볼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었는데, 여기에 한국 핵심 업종을 타깃으로 한 무역보복이 더해진 것이다. 과거사를 둘러싼 경제 외적인 요인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이번 기회에 주된 수출 경쟁 상대인 한국 경제의 근본을 흔들려는 것 같다”는 우려 목소리도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는 말로는 ‘정면 대응’을 외쳤지만 제대로 된 준비도 전략도 없이 우왕좌왕이다. 묻지마식 반일(反日) 운동권 외교가 불러온 예고된 참사인데 외교적 해법은 난망이다. 근린궁핍화의 최대 피해자였던 일본이 가해자로 변신해 맹폭을 가하고, 한국 기업들은 각자도생해야 할 처지다. 이래저래 한국 기업들만 죽어날 판이다.
주요뉴스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