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 친구’와 일산
마두도서관의 책 기증자 이름
호수공원의 나무에 달린 이름
섬말·차돌베기·철럭구덩이 등
개발이라는 미명에 사라진 지명
이야기가 없었던 신도시에 살다
2008년 일산 이야기 쓰기 시작
첫 소설 쓰고 도서관서 낭독회
그 밤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해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이름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소설이다. 2000년 봄, 잡지사에서 퇴사한 나는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개관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산 신도시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마두도서관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침에 종합자료실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고개를 돌리면 정발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 도서관을 혼자 이용하니 백만장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오래 가지 않은 건 어떤 책에 붙은 스티커 때문이었다. 분명 내가 아는, 모 신문사의 문학 담당 기자의 이름이었다. 초기에 장서를 구비할 때, 마두도서관은 시민들에게 기증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 무렵 그 기자는 특파원이 되어 파리로 떠났기 때문에 가져갈 수 없는 책들을 그렇게 도서관에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책 덕분에 나는 도서관 한쪽 벽에 기증자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봤다. 아는 이름이 또 있을까 싶어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내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일까? 기증할 정도라면 책과 관련한 일을 했겠지. 왜 기증했을까? 나이가 드니 책이 싫어졌나? 작은 집으로 이사 온 것일까? 설마 모두가 특파원인 건 아니겠지? 그러다가 정오가 되어 지하 구내식당으로 가 밥을 먹었다. 식사하고 난 뒤에는 자판기 커피를 들고 정발산을 산책했다. 평화롭고 한가한 삶이었지만, 먹구름처럼 걱정은 늘 머리 위를 떠나지 않았다. 뭘 하면서 먹고살까? 그때가 벌써 서른 살이었는데도.
그러니 6년 뒤, 그 신도시로 내가 전입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방 출신이라 그런지 서울시민으로 산 시절이 너무 짧아 서글펐다. “고봉산이 고양군의 제일 명산이라 이 산을 고양군의 중심이라 하는데, 그 고봉산 밑에 있어 중산마을이라고 불린다”는 곳이 새 주소지였다. 대중교통은 최악이었다. 출근 시간이면 시점인 탄현마을에서부터 만차로 나오기 때문에, 좌석버스를 몇 대나 보낸 뒤에야 가까스로 올라탈 수 있었다. 그나마도 구파발까지 거의 한 시간을 서서 가야만 했지만, 고봉산 밑에 새로 지은 22평 아파트는 내겐 궁전 같았다. 그동안 왜 서울에서 살았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신도시의 삶은 쾌적하고 느긋하고 평온했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지금까지 등단작을 뺀 모든 책을 일산에서 펴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내 작가 인생과 이 도시의 역사는 온전하게 겹쳐진다.
그러나 신도시와 함께 성장하는 작가가 된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부산에 갔다가 나는 일산에 없는 것 두 가지를 발견했다. 언덕과 골목.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언덕의 골목길 하나하나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신도시의 쭉 뻗은 도로는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마두도서관의 기증자 이름을 눈여겨보던 시절, 원당역 근처 한 헌책방에서 ‘고양군 지명유래집’을 발견했다. 앞의 중산마을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이 책에서 찾은 것이다.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기 1년 전인 1991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에는 고양군수의 축사가 실려 있다. 마지막 군수는 “곳곳에서 개발의 굉음이 우렁차게 들려오고 있어 (고양군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모되고 있는 중”이라면서도 “모든 사회발전이 뿌리 없이 이뤄질 수 없듯이”라고 해 이 책이 새로 들어설 도시의 뿌리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축사에 담았다.
군수의 바람대로 944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에는 섬말, 도두머리, 차돌베기 등 아름다운 지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발간사에 따르면, “고양군 내의 학생들이나 국문학·한국사 전공 학생들이 현지 주민과의 접촉을 통해 채집한” 것이라는데, 그 학생들이 조사에 나설 즈음에는 일방적인 개발에 절망한 농민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등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한창 언덕이 깎이고 땅이 파헤쳐지던 때였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조사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러므로 그 학생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이 이름들은 다음 세대에게 뿌리가 되었어야 마땅했지만, 신도시는 그 뿌리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속에 묻어버렸다.
물론 앞에서 말한 중산마을을 비롯해 밤가시마을, 양지마을, 강촌마을 등 큰 단지에는 옛 지명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작은 이름들은 모두 사라졌다. 예를 들어 마두1리에는 철럭구덩이라는 큰 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러시아인들이 경의선 철도를 놓다가 러일전쟁에서 패한 뒤 철수하면서 파놓은 웅덩이가 연못으로 바뀐 것이었다. 소설가에게는 철럭구덩이 옆을 지나는 것과 이마트 옆을 지나는 것이 전혀 다르다. 당연히 철럭구덩이 쪽이 이야기를 만드는 데는 더 낫다. 그건 이름만 들어도 ‘철도, 러시아, 구덩이’의 느낌이 나니까. 이런 멋진 이름들이 사라진 도시에 사는 건 작가로서 불행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또 생각했다. 이야기가 없는 도시라면 내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렇게 2008년 나는 일산 신도시의 이야기를 한 번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실마리는 역시 이름들이었다. 이번에는 호수공원에 새로 심은 나무에 달린 이름들이었다. 이름 옆에는 아이의 출생, 부모의 환갑 등을 기념한다고 적혀 있었다. 가족이 병 없이 오래 살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기를. 나무를 심으며 사람들이 바라는 소망은 거의 비슷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방향으로 펄럭이는 만국기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호수공원과 정발산 주변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단숨에 떠올랐다.
이야기는 신도시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나이 대의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 각자 읽고 싶은 시를 들고 와 낭독하는 모임에서 시작됐다. 나는 그 모임의 이름을 ‘함시사’라고 지었다. ‘함께 시를 읽는 사람들’의 줄임말이었다. ‘함시사’라는 암호 같은 이름을 떠올리자 마두도서관의 지하 공간 어딘가에서 진짜 그런 모임이 열릴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상상 속 시 읽기 모임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더니 등장 인물이 하나둘 생겨났다. 우선 대학생. 내가 이 소설을 쓸 때만 해도 일산의 대학생들은 대개 어린 시절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옛 일산과 연결해 주고 싶었다. 해서 대학생에게는 이름 뒤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탐정 역할을 맡겼다.
그보다 더 기뻤던 일은 이 소설을 사람들 앞에서 낭송할 때였다. 발표하지 않은 소설을 낭독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람누리도서관에서 낭독회 제의가 들어와 그런 일이 가능했다. 아직 어디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일산 신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일산의 도서관에서 일산 주민들에게 읽어줄 수 있다니, 엄청난 행운이었다.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 밤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다. 일산에서 사는 건 작가로서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밤이 지난 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이 도시와 나는 이제 같이 늙어가고 있고, 이제는 이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 ‘웨돔’이니 ‘라페’니 ‘호공’이니 하는 이름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이름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깃들 게 분명하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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