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진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IMF후 조부모에 넘겨진 아이들
부모 잃어 불안·스트레스 겪어

마음의 상처 학교폭력으로 옮겨
군대폭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소외된 아이들 디지털 세상 의지
청소년 문제 확대 재생산되기도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로 아이들을 진료하다 보면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아이들의 눈으로 우리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되는 것이다. 슬프게도 지난해부터 부쩍 자주 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있다. 무표정한 얼굴에 바싹 마른 입술에서 한숨이 간간이 흘러나오고 손목에는 자해 자국이 가득한 사춘기 아이들. 처음에는 전문의인 나도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걱정이 심했는데, 자주 접하다 보니 마음의 그늘이 드리운 우리 청소년들에게 만연한 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동료 의사들도 같은 경험을 하면서, 지난해부터 정신건강의학에서 청소년의 자살, 자해 현상에 대한 진단, 치료법에 대해 많이 다루기 시작했다.

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심지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는 것일까? 물론 의사들은 우울증, 성격장애 등 극단적 행동의 밑바탕에 있는 개인의 정신 병리를 치료하는 데 역점을 둔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변화가 청소년 문제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국이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어른들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한 부작용이 심한 나라다.

하물며 아직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의 경우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어른보다 더 힘든 상황일 수 있다. 그 어려움이 행동으로 나타나 자해, 자살 시도 현상이 증가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급격한 사회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정신적 부담과 고통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고 사회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이와 유사한 현상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기로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간다. IMF를 겪은 지 2년 정도 지나, 갑자기 할머니,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각종 스트레스에 찌든 유아들이 진료실을 찾기 시작했다. IMF 때 실직한 부모들은 서로 갈라서거나 직장을 찾으러 타지로 가 버리고, 조부모들이 남은 아이를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

갑자기 애착 대상인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겪는 불안과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정신적 문제로 이어졌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결국 회복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학교에서의 폭력, 집단따돌림 현상으로 나타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안타까운 일도 생겨났다.

또한, 해결되지 않은 학교폭력의 상처는 군대폭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정신과 군의관들의 생생한 경험담도 들린다. 부모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남긴 학교폭력, 군대폭력 사건들의 뿌리가 바로 사회 변화로 인한 개인의 정신적 상처라는 사실이 어른들의 시각으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와 연관된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면 직후에는 놀라고 분노하지만, 이후에는 그냥 잊어 버리고 지내는 식의 반복이 계속된다. 이러다 집단 무기력증에 빠진 사회로 변해 버리지 않을까 두려울 지경이다.

IMF 충격으로 와해된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자란 뿔난 마음이 학교폭력, 군대폭력 현상으로 나타났다면, 최근의 청소년 자해, 자살 시도 현상 이면에는 어떤 사회 변화가 있는 것일까? 이 청소년들을 진료하다 보면 ‘너무 고통스러워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혼란스러워 자꾸 자해를 하게 된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듣게 된다.

또, 술을 마시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와, 만성적인 폭력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는 엄마는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방임함으로써 정서적 학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은 가정사도 흔하다.

최근 들어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동 학대, 이주여성 대상 가정폭력 등 반(反)인륜적인 가족 내 폭력 사건이 저절로 떠오르는 지경이다. 우리 어른들은 극단적인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며 처벌을 강화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남겨진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고 회복시키는 법과 제도의 필요성에까지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남겨진 아이들은 정체성 혼란,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을 극도로 경험하며 소중한 몸에 상처를 내고,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으니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낫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끼리의 어울림이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가면서 오히려 실생활에서는 개인의 소외가 가속화하고 있다. 마음의 고통과 정체성 혼란이 심한 청소년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또래끼리 서로의 절망을 주고받으며 더욱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리게 되는 악순환을 겪을 가능성도 크다.

디지털 세상은 잘 사용하면 한없이 유용하고 재미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아직 성장 중인 아이들, 자기 조절력이 부족하고 왜곡된 인식이 작동하는 개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로 인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알면서도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질주하는 우리 사회는 각종 가짜뉴스와 악플 등으로 개인의 행복과 건강을 좀먹는다. 특히, 절망에 빠진 청소년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환경이다.

이래저래 여러 가정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총성들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치열한 경쟁에만 내몰리는 불쌍한 우리 아이들! 이제 이들에게 각자 존재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고 나가야 할지 이끌어 줄 지혜로운 어른들이 필요하다. 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해 주며 용기를 북돋아 줄 어른들의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우리의 미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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