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평 논설위원

한국 반도체 겨냥 일본 연합군
디스플레이에서도 거푸 좌절
이젠 확실한 무기로 정밀 타격

대기업·수출은 한국 성장전략
‘가보지 않은 길’로 경쟁력 약화
기업 적대·하대해선 활로 없다


엘피다는 비운의 일본 반도체 기업이다. 1980년대 세계 D램 시장의 70%를 장악했던 일본 기업들은 미국 견제와 한국 추격 속에 1993년을 고비로 삼성전자에 왕좌를 내주고 만다. 2000년을 전후해 왕년의 반도체 강자 NEC·히타치·미쓰비시가 ‘삼성 타도’를 외치며 뭉친 회사가 엘피다다. 일본 언론이 ‘히노마루(日の丸·일장기) 반도체’라고 응원했고, 일본 정부는 공적자금도 댔다. 그러나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2012년 파산하면서 미국 마이크론에 넘어갔다. 바로 그해 소니·히타치·도시바 3사가 합작사 재팬디스플레이(JDI)를 출범시켜 한국 디스플레이 아성에 도전했지만, 오히려 대만·중국 등 중화권 기업에 발목이 잡혔다. 조선 쪽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철강·자동차·전자 등 한국 주력산업은 일본을 어깨너머로 배워 기반을 닦은 뒤 스승을 넘어섰다. 일본 전자회사 이익을 모두 합친 것이 삼성전자보다 못한 시기도 있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세계로 약진하는 한국 기업을 배우자’는 사설을 실은 게 2010년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일본은 물론, 세계가 한국기업으로부터 배우려 했던 건 과감하고 스피디한 추진력·도전정신이었다. 한국형 기업전략이다.

한국산업 공략에 번번이 실패했던 일본이 강점을 가진 소재·부품을 무기로 정밀 타격을 해왔다. 이번엔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산업의 심장인 반도체가 혼란에 빠졌고, 백색국가에서 배제되면 파장은 더 커질 것이다. 이번에 새삼 확인된 소재·장비 분야의 열세는 특히 뼈아프다. 그러나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부품업체 키우기에 소홀히 한 결과인 양 매도하는 건 단견이다. 반도체 산업은 소재·장비·제조로 이뤄지고, 한국은 제조 부문에 특화돼 있다. 다른 것도 그러면 좋겠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소재와 장비는 축적한 시간과 시행착오가 기술력을 결정한다. 지금 형태는 각기 다른 강점을 주고받는 글로벌 분업구조의 산물이다. ‘흐름’의 한국과 ‘축적’의 일본도 다른 길을 가는 것뿐이다.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기의 원유다. 중장기적으로 주 공급자인 한국에 불리한 싸움만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비상 상황에 대처한다며 10일 30대 그룹 총수를 청와대에 불러모았다. 이를 두고 얼마 전까지 문 대통령 경제 참모였던 이마저 “기업을 정치·외교 전선(戰線)에 내세우면 안 된다”고 했다. 정부가 사태 원인을 제공해놓고 기업을 총알받이로 쓰는 것은 비겁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비즈니스 천재’라고 불렀던 글로벌 기업인들을 불러놓고 벌인 행태는 더 가관이다. 행사를 꾸린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참석자들에게 3분 발언을 종용하고 ‘1분’ 팻말을 들었다. 코믹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 국민은 웃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 취급을 받은 기업인은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뾰족한 대책이 있을 순 없다. 하지만 한국 산업의 질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묵직한 화두를 받아든 것은 수확이다. 문제는 문 정부에 그럴 만한 역량이나 절박감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문 정부는 출범과 함께 한국경제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대기업·수출 위주 성장전략을 적폐쯤으로 여기고 ‘가보지 않은 길’로 갔다. 최저임금 과속은 산업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주 52시간 강요로 미래 성장을 책임질 연구소 불을 꺼뜨렸다. 견디다 못한 기업과 인재들은 경제 망명길에 오르고 있다. 번듯한 일자리까지 동반 탈출하는 코리아 엑소더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제조업은 이미 위기였다. 미국·일본·중국·독일보다 10년 가까이 늦게 제조업 르네상스를 들고나와 장담하는 ‘제조업 세계 4강’ 구호는 공허할 뿐이다. 시스템반도체·미래자동차·바이오 등 문 정부가 미는 3대 산업도 ‘정권 치적용’으로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공습 와중에 ‘공정경제 성과대회’를 열어 더 꼼꼼히 하라고 채근했다. 공정경제는 재벌개혁의 다른 말이다. 문 정부는 특정 지배구조를 강요하고, 경영권을 흔들고, 공권력으로 대기업 뒤를 캐는 등 궁지로 몰아왔다. 좋든 싫든 대기업은 한국 경제의 주 공격수인데 힘을 빼는 데 정권 전체가 동원됐다. 이적행위가 따로 없다. 일련의 청와대 행보는 기업을 적대·하대하는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기업인을 좌절케 하는 건 일본 공격보다 ‘1분’ 기업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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