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승배 사회부 차장

목 졸린 여성, 성폭행, 배수로 시신, 미제사건…. 화성살인사건과 유사한 요소가 많아 ‘제주판 살인의 추억’으로 불린 10년 전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피고인 박모 씨가 최근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직접적 증거가 사라진 상황에서 피고가 입었던 옷에 대한 미세섬유 분석, 범행시간을 특정하기 위해 숨진 피해자가 사망 당시 무스탕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돼지 사체에 무스탕을 입혀 부패 정도를 측정한 실험 등 온갖 과학수사기법이 동원되면서 숱한 화제를 모았던 사건이지만 법원이 인정할 만큼 결정적이지 못했다. 택시기사였던 박 씨는 지난 2009년 2월 1일 새벽 제주시 용담동에서 보육교사 A(여·당시 27세) 씨를 태우고 애월읍 방향으로 향하던 중 택시 안에서 A 씨를 성폭행하려 했으나 반항하자 목을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인근 배수로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판결 직후 검찰은 “적법만 강조하다 실체적 진실을 놓칠 수 있다”며 분개했다. 사건이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자 재판부를 비판하는 여론도 들끓었다. 유죄냐 무죄냐가 초미의 관심이었지만 이번 판결에서 필자가 가장 주목한 것은 법원이 언급한 ‘위법수집증거(위수증) 배제 원칙’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기거하던 모텔을 수색해 압수한 혈흔이 묻은 청바지는 압수영장을 발부받지 않은 상태에서 취득한 것으로 증거 능력이 없고 이에 따른 미세섬유 분석 결과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수사기관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라는 명분으로 적법절차를 회피하고자 하는 본연의 속성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적법절차에서 벗어난 수사기관에 대한 외부통제를 하는 곳이 법원이다. 독이 든 나무에 독이 든 열매가 달린다는 형사소송법의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최근 법원이 수사기관의 별건 수사 관행에 잇달아 제동을 거는 판결을 선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법원은 강원랜드 채용 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은 권성동 의원에 대해 별건 압수수색의 위법성을 지적하며 무죄를 선고했고,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모 방위사업체 납품업무 담당 직원들에 대해서도 역시 압수수색의 위법성을 지적하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인권국가를 표방하며 출발한 현정부하에서 검찰은 ‘적폐 수사’와 ‘기업수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며 별건 수사, 과도한 압수수색, 조사과정에서의 부당한 심리적 압박, 의뢰인과 변호인의 비밀유지권 침해 등 헌법상의 적법절차 이념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을 숱하게 해왔다. 퇴임을 앞둔 문무일 검찰총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수사는 진실을 밝히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민의 기본권을 합법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수사기관의 통제 받지 않는 권한 확대를 우려했다.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는 최근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국민’이라는 단어를 열아홉 번 언급했다. 강력한 비판 의견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윤 후보자 임명을 강행할 것이다. 그만큼 더 정치적 중립과 ‘민주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책임이 커졌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법치는 무너지고, 윤 후보자 본인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

bsb@
방승배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