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상대방 기분 맞춰주다 보면 우리 일을 못 한다고.” 영화 ‘부당거래’의 부패한 검사 주양(류승범)이 말단 형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내뱉는 말이다. ‘갑’이 ‘을’을 배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대사는 인터넷에서 ‘생활의 명언’으로 떠돌아다닌다. 일상에서는 실제 요구가 부적절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예컨대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예산을 늘리라고 시위를 한다. 지나가는 사람은 “나라에 고마워하며 살아야 해요”라고 시위방식을 탓하며 충고한다. 호의와 권리에 관한 이 대사는 ‘다수자 차별론’ ‘역차별론’의 형성과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한 개그맨이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흑인 분장으로 웃음을 유도했다가 여론이 ‘흑인 비하’라고 비판하자 제작진이 공식 사과하며 영상을 삭제하고 해당 개그맨도 사과했다. 논란이 번지면서 한 동료 개그맨은 “단순히 분장한 모습을 흑인 비하로 몰아가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며 “그러면 영구, 맹구라는 캐릭터는 자폐아 비하이며, 사랑받았던 ‘시커먼스’도 흑인 비하냐”고 반박했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거냐”는 이런 식의 반박에 수긍하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인터넷과 유튜브에 떠도는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난과 희화화도 이런 논리로 번져간다.

지난해 제주도의 예멘 난민 수용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남성은 찬성이 48.6%로 반대(46.6%)보다 우세한 반면, 여성은 반수를 훌쩍 넘는 60.1%가 반대했다. “여성에 대한 성범죄 가능성이 높아진다” “국민이 먼저다”는 구호가 먹혔을까. 약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약자에게 더 관용적이라는 ‘약자의 연대’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양한 소수자 현안·인권·혐오문제에 대해 현장과 밀착한 연구를 진행하며 법·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온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는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대중문화 등에 녹아 있는 구체적 사례부터 해외의 전문적인 연구결과 등을 간단없이 제시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가령, 우리 중 상당수는 남녀와 소수자 차별에 대해 비교적 ‘진보적’이라 확신하며 살지만,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런 건 아닐까. 저자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은밀하고 사소하며 자연스러운 일상에서 ‘선량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차별과 혐오의 순간’을 포착해 “가끔은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벼야 할 때가 있다”고 강조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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