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9월 19일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무대에 21살 장발의 젊은이가 등장했다. 깊고 짙은 어둠 속에서 향냄새가 풍겨오고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는 커다란 톱을 켜며 노래를 불렀다. 객석은 그의 전위적인 무대에 충격에 빠졌다.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그해,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혔다. ‘전설’ 한대수의 시작이었다. 한국 포크록의 시발점인 한대수는 미국 뉴욕에서 히피 문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여 국내에 소개한 시대를 앞선 음악인이었다. 외국곡을 번안해 불렀던 기존 포크 가수들과 달리, 한대수는 데뷔 때부터 자신이 스스로 곡과 가사를 쓴 싱어송라이터였다. 이 때문에 그는 한국 포크의 발전을 이끈 선구자로 평가를 받는다.
한대수는 1948년 3월 12일 부산에서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부의 권유로 미국 뉴햄프셔대에 입학했지만, 곧 자퇴하고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1968년 귀국한 그는 19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파격적인 커버 사진으로 충격을 준다. 당시 군사정권은 이 앨범의 수록곡이자 그의 대표곡인 ‘물 좀 주소’에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 낙인을 찍었다. 한대수는 이듬해 두 번째 앨범 ‘고무신’을 발표했지만, 군사정권은 체제 전복을 꾀하는 곡들이라는 이유로 앨범을 전량 수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땅에서 그가 음악으로 숨 쉴 곳은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도미 후 사진작가로 활동하다가 14년 후인 1989년에 세 번째 앨범 ‘무한대’를 발표했다. 당시 40대로 접어든 한대수는 젊은 연주자들과 협연해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젊고 세련된 사운드를 선보이며 녹슬지 않은 음악적 감각을 보여줬다. 한국 대중음악사 측면에서 중요한 그의 앨범은 1집과 2집이지만, 순수하게 음악적 측면에선 두 앨범을 3집보다 위에 놓긴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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