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前 통일연구원장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가?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적 결속’을 강화하는 가운데 중국의 국방백서는 제대로 가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경북 성주의 사드(THAAD)를 재차 시비하고 나섰다. 또, 지난 23일 러시아 군용기들이 한국의 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하고 독도 상공의 영공까지 침범했는데도 러시아는 되레 한국에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영공을 침범당한 것은 자신들이라며 F-15J 전투기들을 보내 한국이 전투기를 발진시킨 것을 항의하기까지 했다. 뒤죽박죽이 돼 버린 안보 현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중에 북한은 한국 정부가 제의한 쌀 5만t 지원을 거부한 채 ‘신형’ 잠수함을 공개하더니만 25일에는 올 들어 세 번째로 미사일을 쏘았다. 중·러·북의 행동에 대해 ‘신냉전 때문’이니 ‘대미용(對美用)’이니 하는 분석들이 나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변국 모두가 ‘만만한 한국’에 갑질이나 할 뿐 아무도 한국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맹국인 미국이 확산일로에 있는 한·일 갈등을 푸는 것을 돕거나 안보 주권을 유린당한 한국을 위로할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닌 것 같다. 독도 상공에서 네 나라의 전투기와 폭격기, 조기경보통제기 등이 뒤엉키는 ‘공중 쇼’가 벌어지던 순간,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 관심사는 호르무즈 해협 보호 작전에 한국을 참가시키는 것과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는 것이었다.

어쨌든 중국과 러시아는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는 한국과 한·일 갈등이 미국이 펼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약한 고리’임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일본이 먼저 중·러의 군사적 결속을 우려했다면 ‘대국답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한국 때리기’에 나섰다. 중·러는 한·일 양국의 전투기들이 독도를 향해 마주 보며 발진하는 것을 보면서 한·미·일 안보 공조라는 것이 언제든지 산산조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임을 확인하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외로운 동네북’이 됐다.

한국이 존재감 자체를 무시당하는 투명 국가가 된 데에는 ‘신냉전’이라는 외부 요인이 작용했지만, 한국이 자초한 부분도 많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념적 목표에 함몰된 사람들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체제를 가진 근대국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계속성이 폄훼되고 있다. 그리고 최악의 여건에서 ‘최강국과의 동맹’이라는 기적을 만들고 그것이 제공하는 안보 방패와 안정성을 바탕으로 경제 기적을 일구었던 지도자들에게는 사정없이 ‘친일 프레임’이 씌워지고 있으며, 국민은 양분되고 있다. 경제·국방·동맹이 무너지고 있지만, 안보 현실과 경제 현실을 무시한 역주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게다가 묘책 없는 반일(反日) 캠페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친일 프레임 씌우기’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구한말-대한제국을 빼닮았지 않은가? 열강이 발호하고 일본이 힘을 키우는, 외부 세계의 변화에는 눈을 감은 채 친청·친러·친일로 나뉘어 패싸움을 일삼다가 속절없이 망국(亡國)을 맞았던 그때와 흡사하지 않은가.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국민의 대오각성을 기다려야 하는가, 난세를 헤쳐나갈 영웅들의 등장을 기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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