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영 화백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작업실에서 작품을 배경으로 사색에 잠겨 있다. 가운데 ‘Reproduction of the-Manet’는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성 이미지로 한 미발표 작품이고, 왼쪽 작품 ‘Reproduction of time-Bottle’(2017)은 청화 백자를 소재로, 오른쪽 ‘Reproduction of time-blue’(2009)는 첼로 오브제 작품이다.  곽성호 기자 tray92@
한만영 화백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작업실에서 작품을 배경으로 사색에 잠겨 있다. 가운데 ‘Reproduction of the-Manet’는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성 이미지로 한 미발표 작품이고, 왼쪽 작품 ‘Reproduction of time-Bottle’(2017)은 청화 백자를 소재로, 오른쪽 ‘Reproduction of time-blue’(2009)는 첼로 오브제 작품이다. 곽성호 기자 tray92@
한만영 화백 ‘하늘·땅·사람’ 展

‘한국적 팝아트 거장’불리지만
본인은 “내 작품 팝아트 아냐”

누드·슈퍼맨·현악기·갑옷…
파격적 구성 통해 ‘허상’표현
“그 너머의 진짜 세상 봤으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첫 단락에는 수도원을 처음 방문한 윌리엄 수사가 수도원장의 도망간 말을 찾는 과정이 등장한다. 윌리엄 수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이 어디에 있는지 곧바로 알려줘 수도사들을 놀라게 한다. 심지어 말 이름인 ‘브루넬로’까지 맞힌다. 어안이 벙벙한 수도사들에게 그는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라며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 작품이 그렇습니다. 윌리엄 수사는 말이 지나간 흔적을 꼼꼼히 지켜보고 말이 숨어있는 위치, 성격 그리고 이름까지 유추해냈습니다. 지식으로만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식에 관찰력과 통찰력까지 덧대어 그처럼 추리해낸 것이죠. 제 작품이 ‘도망간 말의 흔적’ 같은 역할을 해 이 세상에 만연한 지식의 허상을 깨고, 그 너머의 진짜 세상을 보도록 길을 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현실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현실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知)의 오류에서 빚어진 결과죠.”

한만영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하늘·땅·사람’전이 8월 25일까지 인천 강화도의 해든뮤지엄(관장 박춘순)에서 열린다. 한 화백은 ‘한국적 팝아트’의 거장으로 통한다. 그에게 ‘팝아트’라는 주제어가 따라붙는 것은 레디메이드(기성품) 이미지를 사용하는 창작 방법 때문이다.

1970년대 말까지는 주로 서양의 명작을 차용했으며 1980년대 중반까지는 대중 이미지와 오브제를 끌어들였고, 1990년대 들어서는 우리의 고대 유물이나 벽화, 고전회화도 등장했다. 이후로는 바이올린 등 현악기와 박스 등의 오브제가 선보였고, 벽시계 등을 활용한 설치 작업에 치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창작 방법을 고수하면서도 막상 본인은 팝아트 작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내 작품에 나타나는 각종 문화적 아이콘 등을 보고 ‘팝아트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작품이 팝아트처럼 대중문화와 소비사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방편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 여인의 누드, 호랑이 민화, 고물 텔레비전, 인왕제색도, 가야시대의 갑옷, 할리우드 영화의 슈퍼맨, 프리다 칼로와 해골 그리고 난데없이 오브제로 실제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상반된 개념이나 조형적 이미지를 화폭에 느닷없이 출현시키면서 시간과 공간의 위계질서를 마구 흐트러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 지식이 우리를 가두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 프레임을 깨기 위해 고안한 과정이죠. 지식의 허상 너머 ‘비움과 채움’ ‘생성과 소멸’ 궁극적으로 ‘생명’을 봤으면 합니다. 지식과 정보가 우리를 풍요롭게 하지만 그것이 권력과 신앙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에코의 윌리엄 수사처럼 자신의 그림을 밟고 넘어가 진실과 맞닥뜨리기를 원하는 것인지 모른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이런 견해도 제시한다. “관점의 체계적인 진행 대신 의미의 분열, 분산, 해체만이 가득하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한 화백이 노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화백 본인은 “조형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200호가 넘는 그림 상단에 가분수처럼 반가사유상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하얀 캔버스 위에 왜소하게 붙여진 시계추는 파격적 공간 구성이다. 그 갑작스러운 대비와 충격은 긴 메아리로 관람객을 흔들어 놓는다.

그의 생각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주장을 겹쳐 떠올리게 한다. 호크니는 작업 노트에 “우리는 세상을 기억과 함께 보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 있어도 같은 것을 보지 않는다”고 썼다. 호크니의 문장 중 ‘기억’을 ‘지식’으로 바꾸면 그대로 한 화백의 말이 된다. 한 화백은 “내 회화적 관심은 모나리자가 아니고 그것을 매개로 한 개념공간이랄까, 시간공간이랄까 그런 장치물들을 화면에 재배치하고 병치시킴으로써 대비되거나 환기되는 세계에 있다. 나는 작품을 위해 어떤 장르나 표현 양식에도 구애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실제로 호크니는 포토콜라주 작품을 통해 오독된 지식으로 가득한 현실에 균열을 내려고 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영향을 받은 호크니의 포토콜라주는 여러 시점에서 찍은 풍경 사진을 조각조각으로 오린 뒤 이를 다시 이어붙여 다시점(多視點) 구도로 만든 작품이다. 이는 한 화백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의 화폭 속 충돌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과 유사해 보인다.

한 화백은 “요즘 추상(뭉개진 물감 덩어리)과 구상(사과)을 한 화폭에 올려 ‘회화의 시간성’을 보여주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1946년생으로, 한국 나이로 74세 원로 화백인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실험을 벌이며 도전하는 중이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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