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회경 경제산업부 차장

세계적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 지리학 교수가 최근 출간한 ‘대변동’의 실질적 주인공은 핀란드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위기에 처한 국가가 어떻게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지를 놓고 사례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핀란드는 논의 전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스웨덴과 러시아 식민지였던 핀란드는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전후 꿈에 그리던 독립을 맞이했다.

핀란드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과의 치열한 전쟁 끝에 패배, 전 국토의 10분의 1을 소련에 양도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종전 이후 자유민주주의 국가 핀란드는 중립국을 표방하며 소련과 정치적으로 빈번히 대화하고 공동 경제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 소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보도는 자체 검열을 하기까지 했다. 외부에선 이러한 두 정체성 공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경멸적인 뉘앙스가 담긴 ‘핀란드화(Finlandization)’ 개념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하지만 정작 핀란드에선 서방 진영의 오래된 비난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 소련과의 겨울전쟁 동안 동맹 지원을 간절히 바랐지만, 핀란드를 돕기 위해 나서는 국가는 한 곳도 없었다. 핀란드인 가슴속에 여전히 깊이 남아 있는 상처다. 독립 유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위해 갖가지 치욕을 감내해야 하고 서방 진영의 조롱 역시 대범하게 넘겨야 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냉정한 정세 분석을 통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핀란드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이달 초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 이후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일본은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첨단 소재 3종 수출 규제를 한 데 이어 오는 8월 2일 각의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배제하는 법령 개정을 논의할 계획이다. 외교 문제를 경제 보복으로 돌린 일본도 문제지만, 외교적으로 풀어야 할 사안이었는데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화(禍)를 키운 한국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정부는 현재는 불매 운동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제 여론을 한국에 유리하게 만들어 일본을 압박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공법이라 할 수 없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기준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68.8%로 28.1%에 그친 일본의 2배 이상이다.

한·일 갈등으로 교역이 줄어들 경우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에 비해 타격을 더 크게 입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본 최첨단 소재·부품에 대한 국내 기업 의존도가 높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더럽고 아니꼬워도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직접 나서야 한다. 불매 운동은 우리끼리 신나게 할 수 있지만, 효과가 의문시되는 데다 자칫 일본 국민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 있다. 러시아 군용기의 영공 침입 사건에서 보듯이 한·미·일 군사 공조를 위해서라도 한·일 관계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핀란드화는 수출품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핀란드와 같은 지정학적 특징을 갖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를 일궈낸 핀란드인들의 냉철한 현실인식과 지혜는 우리 것으로 만들어도 괜찮을 듯싶다.

yoology@
유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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