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그네스의 피

잊지 못할 대사 한 줄만으로도 배우는 영생(永生)한다. 관객들에게 남은 그 특정 장면으로, 혹은 그 멋진 대사로, 이미지와 소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연동되고, 중첩돼 하나의 그림처럼 남게 된다. 지난 19일 75세의 나이로 별세한 룻거 하우어가 리들리 스콧의 1982년 작품 ‘블레이드 러너’에서 남긴 대사가 그런 예다. 복제인간 로이 배티 역을 맡은 그는 “모든 순간은 시간 속에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말이야.(All those moment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네덜란드 출신인 하우어는 이 대사 하나로 할리우드 스타로 급부상했고, ‘블레이드 러너’는 스콧 감독도, 주연배우 해리슨 포드의 영화도 아닌 하우어의 영화로 길이 남게 됐다.

하우어는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블레이드 러너’만큼의 성공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1985년 작품 ‘아그네스의 피’(원제 Flesh+Blood·사진)만큼은 그의 수많은 출연작 속에서 묻히기 아까운 수작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김효정 영화평론가
‘아그네스의 피’는 폴 버호벤 감독의 연출작으로 14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당시 유럽은 봉건 영주들 간에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주들은 늘 병사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용병을 고용해 전장에 내보냈다. 마틴(룻거 하우어)은 자신의 용병들을 이끌고 아놀피니(페르난도 힐벡)라는 영주를 위해 전장에서 싸우는 지도자다. 승리를 거두면 성 안의 모든 것을 가져가도 좋다는 영주의 말에 마틴의 용병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결국 승리한다. 그러나 영주는 약탈을 멈추지 않는 용병들을 내쫓아버리고, 성 밖으로 버려진 마틴 일행은 복수를 결심한다. 하염없이 떠돌던 마틴 일행은 아놀피니 영주의 아들 스티븐(톰 벌린슨)의 약혼녀인 아그네스(제니퍼 제이슨 리)가 타고 있는 마차를 약탈하고 아그네스를 납치한다. 마틴의 용병들은 아그네스에게 틈만 나면 손을 뻗치지만 마틴은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그를 보호한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그네스도 자신을 보호해주는 마틴에게 점점 마음이 이끌린다. 한편 이들은 우연히 마주친 성을 점령하고 며칠 머물기로 한다. 마틴이 좋아진 아그네스는 노골적으로 그에게 성욕을 드러낸다. 혼처가 정해지기 전까지 수도원에서 자란 아그네스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섹스를 꿈꿔왔던 것이다. 다른 용병들의 야유를 뒤로하고 아그네스와 마틴은 욕실로 들어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들의 성(城)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납치당한 약혼녀를 찾기 위해 스티븐이 군대를 몰고 이들을 습격한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성에서 마틴의 용병들과 스티븐의 군대가 대결을 펼친다. 용병과 병사들은 피범벅이 돼 나가떨어지고 아그네스를 차지하려는 마틴과 스티븐만 남게 된다. 일반적인 대결 플롯이라면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가 결국 여주인공을 차지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겠지만 ‘아그네스의 피’는 전례 없는 엔딩을 택한다. 아그네스는 자신에게 생애 최고의 쾌락을 가르쳐준 마틴을 사랑하는 듯하지만 그보다 먼저 결혼을 약속했던 스티븐 역시 거부하지 못한다. 망설이는 아그네스에게 마틴은 분노하고 그의 목을 조른다. 스티븐은 아그네스를 가까스로 구해 성을 탈출한다.

‘아그네스의 피’에는 단 한 명의 도덕적인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마틴은 인질로 삼았던 여자를 망설임 없이 강간하는 파렴치한이며 스티븐은 용병들을 꾀어 이용했다가 버리는 아버지와 뜻을 함께했던 치사한 인간이다. 아그네스 역시 섹스밖에 모르는 한심한 여자애일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도덕성의 유무가 아닌 계급으로만 나뉜다. 물론 지배계급도, 피지배계급도 모두 폭력과 섹스, 그리고 영토에 중독된 인간말종이다. 영화의 원제목인 ‘살 더하기 피’는 그런 의미에서 작품이 그리는 세계관을 집약한 공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이뤄낸 문명은 추악한 계급사회에 지나지 않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문명의 주인공들 역시 살덩이와 피로 만들어진 생물에 불과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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