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시인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원형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3평짜리 옛집. 종로구 명륜동 3가 143의 3번지. 미국 올랜도 근처에 살고 있는 시인은 이메일로 옛 지번을 알려주며 낡아 다 쓰러져 가는 작은 집이라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마종기 시인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원형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3평짜리 옛집. 종로구 명륜동 3가 143의 3번지. 미국 올랜도 근처에 살고 있는 시인은 이메일로 옛 지번을 알려주며 낡아 다 쓰러져 가는 작은 집이라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마종기 詩 ‘바람의 말’의 명륜동 옛집

공군 군의관때 정치관여 죄목
고초 겪다 서약하고 미국으로
의사로 성공… 귀향 꿈꿨지만
귀국 무산되고 절망의 나날들

시를 쓰면서 내 동경의 대상은
과거 행복했던 명륜동 작은 집
그 집은 항상 내고향이자 애인
타향살이 달랜 고국의 ‘대명사’


졸시 ‘바람의 말’은 1970년대 후반에 쓰여졌다. 정확하게 어느 해 어느 잡지에 발표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 시를 쓰던 때의 정신적 방황의 전말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6년간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공군 군의관이 되어 3년간 서울과 지방에서 근무했었다. 군 생활의 끝 무렵, 재경문인 한일회담 반대서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공군본부 광장에서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않겠다’는 서약에 도장을 찍고 몇 달 후 제대를 하자마자 고국을 떠났다. 그것이 1966년 여름이었다.

미국에서의 첫해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영어는 서툴고 의학 실력은 부족하고 내가 맡은 환자들은 죽기만 했다. 만 1년간의 말단 의사 인턴 생활은 내 생애에서 제일 긴 한 해였다. 하지만 그 길을 피할 수 없었고 어디에 다른 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국에서 의사로 살아갈 방법은 실력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정신을 차리려고 버둥거리니 앞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나는 내 전공과에서 가장 빨리 전문의가 되었다. 그리고 계속된 의대 교수 생활 4년 만에, 학생들이 졸업식장에서 깜짝 발표하는 ‘올해 최고의 교수상’을 받았다. 일간 신문에도 기사가 실려 학교 안에서뿐 아니라 내가 사는 도시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또 귀국하지 않겠다고 도장을 찍은 생각에도 덜미를 잡혀, 고국을 찾은 것은 내가 떠나자마자 돌아가신 아버지 성묘를 위해 5년 만에 잠시 귀국한 것이 전부였다.

그 뒤 고국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에 두 번째 귀국을 했다. 그때 모교 의료원장이시던 은사님이 내가 전공한 과에 마침 교수 자리가 비었다며 귀국을 종용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곧 귀국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 고국의 의학계는 미국보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져 내가 환자를 위해 매일 사용하는 초음파 영상기기나 시티 기기가 대학 병원에 아직 설치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국준비와 강의준비에 들떠 있던 내게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서울에서 일간지 민완기자로 활약하던 동생이 남북 회담 취재 차 판문점을 들락거리던 때, 위독하신 큰아버지의 애걸을 거절하지 못하고 북에 산다는 사촌의 생사여부를 알아보다가 중앙정보부에 걸려 해직당하고 어디에도 취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혼을 해서 두 아이가 있던 동생은 배추장사라도 하겠으니 미국에서 살도록 초청해 달라고 했다. 덩달아 대학 교직에서 은퇴하신 어머니도 자식 하나 없는 고국에서 살기가 힘드셔서 미국으로 오시니 나는 갑자기 부양가족이 많아졌고 내 야심 찬 귀국은 그렇게 아주 간단히 무산되고 말았다.


환히 보이던 귀국 길이 갑자기 무너진 뒤 누구에게도 내색할 수 없이 완전히 절망적인 날들을 보내며 혼자 숨어서 울고 지내던 와중에 이 시 ‘바람의 말’이 태어나게 되었다.

‘바람의 말’이란 시를 다시 읽어본다. 아름다운 사랑의 끝막음과 이별의 슬픔이 보이고 애절한 미련이 보인다. 다른 이들은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진 두 연인의 사별의 사연으로 읽기도 했다. 물론 시에 펼쳐져 보이는 표현이나 문맥은 그렇다. 그러나 내가 정작 이 시를 쓰게 된 것은 꿈에서까지 그리던 내 나라와 내 집, 그 귀국을 포기해야 하는 힘든 심정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시의 의도가 사랑과 이별이든 사별과 소통이든 아니면 나라나 어느 특정 장소와의 이별이든 그 선택은 시를 읽는 이의 것이고 바로 그런 것이 시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시가 발표된 뒤 그 시의 실소유자는 그 시를 읽는 이라고 나는 아직 믿고 있다.

고국이나 나라라고 하면 어딘지 너무 크고 막연하지만 이 시를 쓰면서 내가 보고 있던 대상은 오래 살았던 서울 명륜동의 작은 집이었다. 그 집은 내가 떠날 즈음에 이미 많이 헐어 있었다. 그러나 그 13평가량의 작은 집에서 나는 물론,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했었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했고 여유는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늘 즐겁게 살던 곳이었다. 시에서처럼 나에게 ‘착한 당신’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집은 아마도 1920년대나 1930년대 초에 지어졌을 것이다. 버스가 오가는 큰길에서 성균관대로 들어가는 길을 가다가 왼쪽으로 첫 번째 골목. 그 골목을 끝까지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아서자마자 오른쪽에 위치한 조그만 집. 이제는 그 주위의 집들이 모두 증축을 해 대부분 2∼3층의 빌라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가 살던 그 작은 집만은 아무도 손보지 않은 채 폭삭 늙어 가뜩이나 작은 집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하다. 거기에 더해 아담하고 고풍스럽기까지 하던 골목길은 해가 갈수록 더 헐벗은 모습으로 더러워졌고 쓰레기 더미가 널린 술집들이 하나둘 골목길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 번 누구에겐가 왜 우리가 살던 옛집은 증축은커녕 아무도 다듬지 않는지 물어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분 말로는 그 집 주인이, 돌아가신 선친의 기념관이 곧 들어설 것이란 소문을 듣고 되도록 그대로 보관해 돈을 더 받고 팔려는 심산일 것이라고 했다. 물론 최근까지도 몇몇 아동문학가 단체나 한국에 처음으로 서양 무용을 들여온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제자분들이 정부나 공공 기관에 기념관 설립을 청원하고 있다. 하지만 골목길에 초라하게 앉아 있는 이 집이 기념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런 과정을 몇 년 동안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내가 별로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부모님이 그런 것을 그리 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분들은 예술가셨지 대단한 의인이나 영웅도 아니셨고 그분들의 예술가적 영혼은 그분이 남긴 글로, 그리고 무용을 계승하는 제자들에 의해 이어진다는 간단한 진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명륜동 집에서 1948년부터 살았다. 아버지의 고향인 경기 개성에서 해방을 맞고 개성의 만월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했다. 혜화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한국전쟁의 쓴맛을 보았고 피란 생활 끝에 같은 집에 돌아와 서울 중학교와 서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집에서 연세대 의예과에 입학해 6년간의 의대생 생활을 보냈고 의대생 중에 시작된 초년병 시인의 삶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이 되어 마침 공군 본부와 공군 사관학교에 근무할 때도 명륜동 집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명륜동의 그 집은 언제나 내 고국의 대명사였고 정처 없이 외국을 떠돌며 살아온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내 고향이었으며 내 애인이었다. 내가 고국에서 산 날들의 대부분이 그 집에서였기에 내 고국 추억도 대부분 그 집에서 시작돼 그 집에서 끝이 난다. 갑자기 졸시 ‘박꽃’이 생각난다. 그 집의 작은 마당에는 한쪽에 장독대가 있었고 바깥벽 쪽으로는 매해 아버지가 박과 봉숭아를 심으셨다. 어느 해였는지 내 예과 시절의 한 초가을 밤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한밤 늦게까지 있다가 화장실에라도 가려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몇 발자국 거리의 건넛방에 있던 아버지가 나를 보시더니 이리 와서 이것 좀 보라고 손짓을 하셨다.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너 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사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졸시 ‘박꽃’ 전문)

내게 눈물을 보이셨던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미국에서 사시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내 남동생도 이승을 하직한 지 오래됐다.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명륜동의 그 옛집은 이제 어림잡아 100세에 가깝다. 긴 세월 누구에게도 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누추한 그 옛집은 머지않아 허물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목이 나쁘지 않아 산뜻한 빌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착한 당신’이여, 허물어지든 아니면 다른 집으로 다시 태어나든, 오랜 세월 모든 질곡의 인연을 넘어 내 행복과 기쁨은 항상 당신과 함께, 그리고 당신이 한평생 산 내 나라와 함께 이어져 왔다는 것은 잊지 말아다오. 그 옛날 눈비를 가려주고 단란한 우리 가정을 따뜻이 감싸주었던 당신의 사랑도 큰 고마움이지만 50년이 넘은 내 신산한 떠돌이 신세 중 언제 어디서나 내 버팀목이 되어준 당신. 오랜 세월 시종 내 희망이었고 믿음이었던 당신. 당신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시인 마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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