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미국 워싱턴 DC는 한국에서 잇달아 온 정부 고위 관료와 국회의원들로 부산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 한·미·일 의원회의 국회 대표단 등 워싱턴을 찾은 이들의 목적은 미 행정부와 의회에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 부당성을 호소하고 중재를 요청하는 일이었다. 한국은 고위 관료들을 잇달아 미국에 보낸 반면, 일본은 고위 관료 파견 없이 일상적인 업무를 하고 있다. 양국이 한·일 갈등 후 대미 외교에서 이처럼 상반된 모습이지만, 미국 내 분위기는 한국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 정부 고위 관료나 의원들이 미국 정부·의회 인사를 만난 뒤 전한 한결같은 반응은 미국이 양국 문제에 개입하는 상황을 꺼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 의원들은 미국의 역할이 필요한 줄은 알지만, 아직은 어느 쪽을 편드는 것 같은 인상은 안 주려고 한다”는 외교관 출신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말이 현재 미국 분위기를 가장 잘 설명한다. 한국이 일본의 경제적 보복에 대비해 세웠던 미국을 통한 대일 압박이라는 외교전략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는 그동안 반일에만 매달려 일본을 이겨내려는 극일 전략을 고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미국에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을 억제하고 핵보유국을 꿈꾸는 북한을 압박할 주요한 동맹국이다. 특히 일본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 중인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을 만들어 미국에 제시한 국가다. 게다가 일본은 이번 수출 제한 조치를 가하기 몇 개월 전부터 미국 측에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해왔다는 사실은 외교가에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이 최소한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게 해놓고 일을 벌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의 요청을 받고 한국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봤다면 하수라는 점을 자인하는 셈이다.
미국의 ‘분쟁 중지 협정’ 서명 촉구 등 최근 움직임도 한·일 모두에게 냉각기를 가지라는 주문일 뿐이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반일만큼 달콤한 만병통치약은 없다. 식민통치의 쓰라린 경험과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라는 기름에 반일이라는 불꽃만 붙이면 거대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 야당도 이명박 전 대통령 당시 독도 방문, 박근혜 전 대통령 당시 위안부 문제라는 반일 카드를 지지율 반전에 활용했다. 문제는 대부분 정권이 일본을 이길 전략 없이 반일 카드에 취해 있다가 결국에는 역습을 당했다는 점이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했다가 일본자금 대거 유출로 국가부도를 맞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일본 협상에 말려 어설픈 위안부 합의로 국내 반발을 샀던 박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 원하는 전술로 싸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때 12척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폭이 좁은 울돌목에서 조류가 변화하는 시간에 포 효과를 극대화하는 일자진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단순히 죽기로 싸웠기 때문에 승리한 게 아니라 완벽한 장소와 시간, 전술 아래 죽을 각오로 싸워 승리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자주 입에 올리는 문재인 정부가 과연 이순신 장군만큼 극일 전략을 세워놓고 국민에게 일본과 대결하자고 하는지 궁금해진다.
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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