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직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처음 전화 통화를 한 건 대통령 당선 이틀 후인 2017년 5월 11일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각국 정상과의 전화 통화는 축하와 덕담으로 채워지는 게 관례인데, 당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이례적으로 ‘파열음’을 냈다. 지난 2015년 한·일 양국 간 이뤄진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과거사와 외교 문제가 경제보복으로 이어진 사상 최악의 한·일 충돌이 양 정상 간 첫 통화부터 예고됐던 셈이다.

논리를 중시하는 문 대통령과 과감한 스킨십을 마다하지 않는 아베 총리는 스타일이 워낙 다르다 보니 외교가에선 ‘금성 남자와 화성 남자’로 비유되기도 한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이번 한·일 강대강(强對强) 충돌로 국가 이익은 논외로 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적지 않은 플러스 효과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아베 총리는 지난 7월 4일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21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연립정권 과반 확보로 안정된 정치 기반을 다졌다. 일본인의 70%가 수출 규제를 찬성하고, 52%는 개헌 추진 국민투표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전쟁 가능한 개헌’에 목을 매고 있는 아베에게 천군만마다. 대일(對日) 경고까지 꺼낸 문 대통령의 단호한 대응도 여론에 어필하고 있다. 심화하는 경제위기와 북한의 연이은 도발 등 겹악재에도 불구하고 한때 40%를 위협받던 문 대통령 지지도는 한·일 충돌 이후 오히려 50% 안팎으로 뛰어올랐다. 한·일 양국 내 심화하는 반일(反日)·혐한(嫌韓) 기류가 일종의 정치적 자양분이 된 셈이다.

이렇다 보니 ‘문·베(문재인+아베) 정권’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다. ‘국민 분노를 무기 삼아 국제적 룰(rule)을 가볍게 보고, 권력 강화를 위해 국민과 기업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정권’이란 뜻이란다. 외교 문제에 통상 무기를 끌어들이는 건 자유무역의 근간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부가 지난 2일 각의에서 한국의 백색국가 제외를 강행했다. 이에 문 정부도 단호한 맞대응을 천명했다. 앞으로 반일·혐한 광풍(狂風)의 위세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한·일 간 경제·안보 상호협력 필요성엔 눈을 감은 채 서로를 적(敵)으로 규정하는 반이성(反理性)이 득세할수록, 문·베 정권의 적대적 공생(共生)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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