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선임기자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조치로 한·일 간 갈등이 점차 깊어지고 있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수출 규제 경제 보복 협박 카드로 대응했고,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카드를 꺼낼 태세다. 두 나라의 대결을 불러온 근본적 원인과 대응 과정에서의 잘잘못을 가리자면 논란은 끝이 없다. 분명한 것 중 하나는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 간 외교 불문율, 즉 정경분리 원칙을 어기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우려는 안보 피해다. 지소미아 파기가 그런 경우다. 그건 한·미·일 3각 안보 협력의 균열을 부른다는 점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 될 수 있다. 한반도는 전체주의적 야만으로부터 자유세계의 문명을 지켜내려는 전쟁이 치러지는 현장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6·25 정전 협정으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을 ‘문명의 선’(line of civilization)이라 부른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여기 이 반도에 세계를 돌고 시간을 통해 내려오는 ‘문명의 선’이 그려졌습니다. 그것은 평화와 전쟁, 품위와 타락, 법과 폭정,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곳에서 수없이 그어진 선이며, 그 선을 지켜내는 것은 자유 국가들이 언제나 해야만 했던 선택입니다.”(트럼프, 2017년 11월 8일 ‘대한민국 국회 연설’ 중)

문명의 선이 그어진 반도의 하늘은 현재도 중국과 러시아의 전폭기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있다. 바다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을 저지하려는 중국의 반(反)접근·지역거부(A2AD) 및 대륙 굴기 전략에 막혀 있다. 문재인 정부가 눈 감은 사이에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다. 지소미아는 이렇게 전체주의와 자유세계가 부닥치는 문명의 최전선에서 한·미·일 안보 협력을 엮어내는 장치다. 그런 점에서 지소미아 파기는 반일을 핑계로 한 반미선언이자 친북선언이며 친중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 목소리가 정부와 여당 내에서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은 영원히 한국 편일까. 한국이 미국과의 공유 가치를 부정한다면 미국은 미련 없이 문명의 방어선을 일본으로 옮길 수도 있다. 한반도 유사시 중국은 지체 없이 북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게 돼 있지만(‘조·중 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제2조), 미국의 참전 여부는 워싱턴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한미 상호방위조약’ 제3조). 미국의 대외정책엔 늘 강대국 중심의 현실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한다. 2017년 미국은 중국과의 ‘빅딜’을 구상했다. 북한 비핵화와 주한미군 철수를 교환한다는 게 그 요체다.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이 주창했다가 잠시 주춤한 상태다. 미국은 여차하면 한국을 제치고 일본을 아시아·태평양 방어의 최전선으로 내세울 준비가 돼 있다. 동맹 의무의 회피, 문명 전선에서의 탈영, 이런 게 그런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오는 24일은 지소미아의 연장 만료일이다.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파기 선언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사실이라면 거센 후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그걸 모를 리 없다. 혹은 그걸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minski@
허민

허민 전임기자

문화일보 /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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