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다운 비가 없는 무더운 여름이다. 그렇다고 2018년처럼 새로운 온도를 경험하러 밖에 외출해 보는 살인적인 더위는 아니지만 올해도 역시나 무더위는 맹위를 떨치며 머릿속에서 시원한 음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중에서도 냉장고에 있던 갈색 병은 무더운 날씨에 밖으로 나온 우리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에 땀을 흘리는 모습으로 변한다. 갈색 병 안에는 우리의 몸을 시원하게 해줄 짙은 황금색 음료가 탄산을 가득 품은 채 들어 있다. 이 음료는 전 세계에서 주로 ‘비어’나 ‘비루’라고 불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음료를 그렇게 부르지 않고 ‘맥주’라고 부른다. 나라마다 고유의 호칭이 있을 수 있기에 우리만의 표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호칭은 우리가 원해서 시작하거나 만든 게 아니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가 이 음료를 ‘비어’가 아닌 ‘맥주’라고 부르게 된 것은 옆 나라 일본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맥주’와 같거나 비슷한 발음을 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에도(江戶)막부가 통치하던 시절에 왜국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나 유일하게 통상을 하던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다. 포르투갈이 전에 사용했던 나가사키(長崎)에 있는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인 ‘데지마(出島·でじま·dejima)’에 터를 잡고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본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축구장 두 개 크기의 땅을 통해 ‘화란(和蘭)’이라고 불리던 네덜란드의 문물과 기술은 일본에 전해지며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때 같이 전해진 문물이 바로 맥주다. 1798년에 모리시마 주료(森島中良)가 만든 화란어 사전인 ‘만어전(蠻語箋)’에 처음으로 맥주가 등장한다. 이 책은 2000여 단어에 가타카나로 네덜란드의 음을 표현한 단어집으로 음식을 표현한 부분에 ‘麥酒’라고 쓰고 ‘ビ-ル’라고 표기하고 있다. 한자를 따로 읽으면 麥(mugi)와 酒(sake)로 읽지만 같이 읽으면서 ビ-ル(비루·Biru)로 읽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표기가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읽히는 일본 단어가 하나 더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독일(獨逸)이다. 우리와 달리 일본은 獨逸이라고 쓰고 가타카나로 ドイツ(도이쓰·Doitsu)라고 읽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들어온 줄도 모르고 우리는 일본의 표기대로 단어를 사용했다. 일본인들이 獨逸麥酒를 ドイツビ-ル(도이쓰비루·Doitsu Biru)라고 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식 발음인 ‘독일맥주’라고 부른 것이다. 한자 그대로 풀어보면 홀로 독(獨)과 빼어나다 일(逸)을 ‘홀로 빼어나다’로 풀이할 수 있다. 단 두 번 있었던 세계대전을 모두 일으킨 도이칠란트는 국토가 황폐화된 패전을 극복하고 유럽의 은행 역할을 할 정도로 부유한 나라가 됐다. 도이칠란트가 먼 나라 한국에서 자신들이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독일로 불리게 된 것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일본식 표기가 그 원인이라고 하겠다. 반면 서반아는 스페인으로 불란서는 프랑스가 됐다.

비어의 종주국으로 인식되고 있는 도이치의 비어는 한국에서 독일맥주로 불리며 여전히 인기가 높다. ‘치맥’보다는 ‘치비’로 ‘독일맥주’ 대신 ‘도이치비어’로 표기하는 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깊어가는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으며 큰 잔에 홉 향을 가득 채워 한 모금 해야겠다.

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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