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호에 달이 뜨자 호숫가에 마련된 무대 위 조명이 꺼졌다. 1920년대 무성영화 ‘이기주의자’의 막이 오르고, 폴란드 음악가 마르친 푸칼룩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기반으로 라이브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한낮의 무더위가 선선한 바람에 잠시 자리를 내준 여름밤, 관객들은 오묘하고도 경쾌한 무대에 빠져들었다.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단 하루를 남겨두고 있다. 37개국 127편의 음악영화를 비롯해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상영회, 국내외 음악영화 발전을 위한 포럼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주말을 맞아 많은 관객이 모였던 지난 10일, 제천 곳곳을 둘러봤다.

서울의 새벽안개를 뚫고 도착한 제천 시내는 이른 시간부터 들뜬 분위기였다. 펄럭이는 현수막과 이벤트를 위한 부스들, 저마다 다른 티켓을 들고 상영시간을 확인하는 관객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축제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날 관람한 두 편의 영화 ‘하챠투리안의 칼춤’(감독 유수프 라지코프·사진)과 ‘더 컨덕터’(감독 마리아 피터스)는 모두 실존 인물의 삶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하챠투리안의 칼춤’이 작곡가 아람 하챠투리안의 어두운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면, ‘더 컨덕터’는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반짝이던 시기를 흥미롭게 펼쳐 보였다.

‘하챠투리안의 칼춤’은 전쟁과 혁명의 폭력, 무질서가 개개인의 일상을 헤집던 1900년대 초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하챠투리안이 발레 음악 ‘가야네’를 작곡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가 느끼던 창작열과 예술적 영감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국가 검열과 통제로부터 느끼는 좌절감을 섬세하게 재현했다. 서늘하고 음울한 러시아의 풍경, 여린 내면을 감춘 채 뜨겁게 울부짖는 인물의 묘사가 지극히 예술적인 장면들을 빚어내며, 무엇보다 큰 성공을 거둔 그의 음악 ‘칼의 춤’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더 컨덕터’는 1920년대 말, 최초의 여성 지휘자를 꿈꾸던 네덜란드 출신의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토대로 관객에게 영화적 재미를 선사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브리코가 유럽의 사교계와 음악학교, 연주회장 등을 오가며 각종 시련을 겪는 스토리는 기시감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경쾌한 연출, 극적으로 펼쳐지는 장대한 클래식 음악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보고 듣는 즐거움을 선물한다.

한국에서 그리 친숙하지 않던 음악영화라는 장르에 전념하며 성공적인 지역예술제 사례로 손꼽히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15년이라는 세월을 축적해 노련한 운영 방식까지 보여줬다. 국내에 믿고 떠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적인 여름 휴가지가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13일까지.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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