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는 과연 설득되었을까? 1444년 2월 20일 세종과 최만리 사이에 벌어진 ‘한글 찬반논쟁’은 세종실록 전체에서 매우 특이한 기록이다. 이날 실록은 최만리 등 집현전 노장파들의 상소로 시작된다. 세종은 경복궁 사정전으로 최만리 등을 불러 그 상소를 읽게 한 다음 대화를 나눴다. 말이 대화이지 왕의 힐책에 가까웠다. 마치 축조심의(逐條審議)를 하듯이 세종은 상소문의 구절구절을 들어 비판했다.
우선 세종은 문자라는 게 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지를 물었다. 중국의 한자나 설총의 이두까지도 모두 백성을 편리하게(便民)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편민(便民)’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공부의 목적은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있음을 역설했다. 명나라에 사대(事大)하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 백성의 생생지락(生生之樂), 즉 모두가 안정되고 즐거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게 세종의 주장이었다.
최만리의 대응 역시 만만치 않았다. “군왕이 새롭고 기이한 기예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는 말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왕의 나무람에 대해서 그는 일단 사과했다. 하지만 그는 곧 설총의 이두와 언문의 차이점을 짚고, 언문은 이두와 달리 아주 새로운 글자 형상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고 반박했다. 세자가 언문작업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창손의 비꼼, 즉 “‘삼강행실도’를 보급한 후에도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말에 대해 세종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용속한 선비’라며 진노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비가 글을 배워 나랏일을 하는 것은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깨우쳐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기 위함인데, ‘백성에게 문자를 만들어 주어도 자질이 안 되기에 아무 소용없다’는 태도는 배우는 자의 본분을 망각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 또는 힐책을 들었던 최만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종으로부터 ‘내 뜻을 환히 아는(灼知予意) 사람’이라는 평을 들은 최만리는 세종의 주장, 즉 공부의 진정한 목적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길을 찾는 데 있으며, 구성원 모두가 신명 나게 살아가는 나라가 진정한 문명국이라는 ‘세종의 뜻’을 받아들였을까? 내가 보기에 최만리는 세종의 숨은 의도를 꿰뚫고 구현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글이 세계 문명사에 끼칠 영향, 새로운 문자의 장점과 그 위험성, 그리고 명나라와의 외교갈등 등을 조목조목 글로 써서 드러내는 임무를 맡았다.
세종은 그를 불러 상소의 내용 하나하나를 읽게 했고, 사관이 모든 대화를 기록하는 가운데 왕 자신의 의도와 신하들의 반대 논리를 ‘폭로’하게 만들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놓으면 후대 누군가가 바르게 평가하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최만리는 그런 세종의 뜻을 이해하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만약 ‘언문은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이며 ‘문명의 큰 흠절’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아마도 그는 불교비판 때처럼 지속적이고 가열 차게 반대 상소를 올리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사정전에서의 대화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한 여생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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