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무엇입니까’ 출간

1969년 이화여대 신입생을 대상으로 취미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독서’와 ‘음악감상’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70세의 시인 주요한이 그해 어느 기관에 제출한 신원진술서의 취미란에도 자필로 ‘독서’라고 쓰여 있었다. 50대 이상이라면 학창시절 흔했던 신원 조사에 ‘취미란’이 빠지지 않았고 대개 ‘독서’를 써넣었던 기억을 가졌을 것이다. 언제부터 독서와 음악감상이 한국인의 취미가 됐을까.

문경연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가 ‘취미’라는 일상 개념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형성·변천하는 양상을 분석한 ‘취미가 무엇입니까?―취미의 일상 개념사와 한국의 근대’(돌베개)를 펴냈다. 책에 따르면, ‘취미’는 한자 ‘취’(趣)와 ‘미’(味)로 이뤄져 중국에서 만들어진 오래된 개념으로 보이지만, 서구의 ‘taste’가 일본인들에 의해 ‘슈미’(しゅみ·趣味)로 번역되면서 우리에게 이식됐다. 조선 시대에도 취미(臭味), 풍류(風流), 기(嗜), 벽(癖), 치(致) 등 용법과 의미가 달라도 취미와 유사한 개념이 있었다. 국내에선 ‘황성신문’(1899년 7월 7일) 논설에서 처음 ‘취미’가 등장한다. 황성신문은 부국강병, 식산흥업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사용됐고, 최남선이 펴낸 잡지 ‘소년’과 ‘청춘’에서는 근대 문명의 ‘신지식’ ‘고상한 쾌락’ ‘삶의 활력’ 등 현대적·계몽적 의미로 쓰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 당시에는 관앵회(觀櫻會)라고 불린 벚꽃놀이가 도시생활의 취미로 선을 보였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해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운 뒤 벚꽃놀이 명소로 조성한 것은 식민주의적 의도로 대중적 취미생활을 만든 것이다. 공진회(共進會)와 박람회(博覽會)도 관람이라는 취미 형식으로 조선인을 관리하고 규율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에게 가장 대중적인 취미 중 하나인 ‘영화관람’은 1920년대 이후 급속히 확산돼 1930년대에 영화관이 100여 개로 늘었고, 관객 수는 1935년에 880만 명을 기록했다. ‘극다광’(劇多狂), ‘영화광’, ‘키네마 팬’, ‘영화청년’ 등의 ‘취미광’(hobbyholic)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취미는 처음 그 용어가 나온 지 20~30년 만에 인간관계와 문화생활 등의 라이프스타일을 결정하는 기호(記號)가 됐고, 결혼 조건으로 “취미가 맞는 사람”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취미’가 인간적 자질, 개인 프로필을 이루는 현대인의 조건이 됐으며, 학적부나 이력서 등의 공사 문서에도 ‘취미란’이 생겨났다.

일제 말기 전시체제가 가동되면서 ‘매일신보’ 같은 총독부 기관지는 사치품 소비와 대중문화 향유를 퇴폐 문화로 낙인찍고, 취미의 ‘정화’나 ‘건전한 취미’ 등의 수사를 통해 ‘취미’를 제한했다. 1940년 모윤숙이 매일신보에 쓴 ‘신생활운동과 오락 취미의 정화―고상한 오락은 신성한 노동과 가튼 것’은 당시 ‘노동’을 ‘취미’로 전유하는 어용 논설이다. 전시체제에서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취미’라는 개인주의적 개념조차 식민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것이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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