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일까 상황일까 / 리처드 니스벳·리 로스 지음, 김호 옮김 / 심심
고전이 된 사회심리학 교과서
인격·기질 지나치게 신뢰하고
상황 과소평가하는 오류 지적
어린 시절 학대당한 경험들
환경 변하면 영향 오래 안 가
보수적 집안 학생 대학 진학뒤
진보 또래 만나 성향 바뀌기도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뒤, 관료적 무관심에 빠져 주어진 명령의 의미를 생각 없이 수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진실, 즉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극악무도한 사람만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우리의 상투적 결론과 배치된다.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실험은 아렌트의 주장이 현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실험 참가자는 학습에서 처벌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해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 실험 참가자는 임의로 교사가 돼 학습자가 단어를 암기하지 못할 때마다 15V씩 세게 전기충격을 주도록 요구받는다. 전기충격기에는 ‘약한 충격’에서 ‘위험’까지, 심지어 마지막 두 단계엔 ‘×××’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학습자는 실험 참가자가 보이지 않는 벽 너머 전기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다. 처음에 학습자는 기꺼이 실험에 협조한다. 하지만 전기충격 강도가 높아지면서 학습자의 비명과 항의가 거칠어지고, 급기야 벽을 두드리면서 답변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실험 참가자는 실험을 계속해도 좋을지 염려하지만, 밀그램은 무응답을 오답으로 간주하고 자신이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면서 실험을 강행하도록 만든다. 실험 참가자는 행동을 멈췄을까. 아니다. 대다수는 막판까지, ‘위험’을 넘어서 ‘×××’ 수준까지 복종했다.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설계해도 결과는 비슷했다.
이 실험은 “특별하고 상대적으로 미묘한 상황의 힘이 사람들의 친절한 성향을 넘어선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물론 실험 참가자가 항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그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실험을 그만두고 싶을 때 누를 수 있는 버튼과 같은 ‘불복종 경로’가 없고, 학습자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는 등 ‘상황을 안정적으로 정의할’ 경로가 차단당할 때, 아주 소수만이 단호하고 독립적으로 실험을 중지하고, 대다수는 권위에 도전하거나 역할에 따른 기대를 부정하지 못한다.
이 책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격 특성과 성향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신뢰하고, “상황 요인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은 과소평가하는 ‘기본적 귀인 오류’를 저지른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이 평생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그러나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실제 대다수 사례에서 그 영향은 장기적이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면 인간은 달리 행동한다. 배닝턴대에 입학한 부유층 학생들이 보여 준 것처럼, 보수 집안에서 자란 사람일지라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진보적 또래 집단과 어울리면 정치성향이 바뀌어 부모와 갈라선다. 이렇게 형성된 태도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오랫동안 지속된다.
따라서 가정폭력 같은 학대가 발견될 경우, 국가나 사회가 개입해 부모와 아이를 강제로 분리하고 적절한 보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아이는 새로운 경로 요인에 따라 상황을 새롭게 수용해 구성하고 불안 상태 등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히 이해해선 안 된다. 하나의 상황은 개인 정신에서 또래 같은 비공식 사회집단, 조직이나 국가에 이르는 모든 힘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이 성격이나 기질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수많은 전설적 실험으로 가득 차 있다. 사회학, 심리학, 경영학, 교육학 등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이 실험들은 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바꾸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엄청난 영감을 준다. 아이들 수학 실력을 끌어올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 버클리대 수학자 트레이스먼에 따르면, 아이들을 집단으로 공부시키는 ‘우등’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문제풀이에 실패해도 친구 중 누군가 해결책을 갖기 쉬우며, 문제를 해결했을 때 친구들의 감탄이라는 즉각적 만족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단체 텔레비전 방송에서 사람들이 자선 캠페인에 더 많이 참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사람들 심금을 울리는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전화번호를 화면에 띄워놓고 “이 번호로 지금 당장 전화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 각성을 통해선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구체적 경로가 있을 때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물론 이 방법은 홈쇼핑 등에서도 흔히 응용한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1991년에 나온 책이기에 후기에 간략히 요약된 것을 제외하면 그사이 밝혀진 많은 과학적 사실이 보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같지는 않다. 사회심리학에 입문하려는 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 볼 것을 기꺼이 권한다. 608쪽, 2만8000원.
장은수 이감콘텐츠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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