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녹두꽃’우금티
해지면 도적 출몰 공주 고갯길
소몰고 넘는 걸 금했던 우금티
2006년 터널 뚫리고 공원으로
매년 예술제를 열고 장승 세워
올해에는 日보복에 맞서 ‘척왜’
동학군의 송장이 논배미에 쌓여
붙여진 ‘송장배미’엔 아픈 역사
고마나루로 이어지는 들에서는
농민군 넋 달래주는 제 올리기도
횃불·함성·절규 지금도 생생히
해산을 혀서 목숨은 부지할지 몰라도 더 이상 접장은 아니겄제. 양반 있던 자리에 왜놈이 올라 타갔구 다시 개돼지로 살아야겄재. 그래서 난 싸울라고. 그래서 난 싸울라고.... 겨우 몇 달이었지만... 사람이 동등하니 이 대접하는 세상 속에 살다본 게 아따 기깔라갔꼬, 다른 세상에서 못살 것드랑께. 그래서 나는 싸운다고. 찰나를 살아도 사람처럼 살다가 사람처럼 죽는다 이 말이여.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동학농민군의 별동대장인 백이강(조정석)은 그렇게 외친다. 그것은 싸우다 죽겠다는 다짐과 다를 바가 없다. ‘녹두꽃’이 담은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 우금티 전투에서는 무려 2만여 명의 동학군이 일본군의 최신식 총 앞에 속절없이 스러졌다. 그들은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공주로 들어가는 길목, 우금티를 넘으려 했다. 어째서 죽을 걸 알면서도 2만여 명이나 되는 동학군이 그렇게 달려들었는가 하는 건 저 드라마 속 백이강의 절규 속에 담겨 있다. 영겁을 산다고 과연 살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개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동록개(동네 개새끼)라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건 사람한테 붙일 이름이 아니었다. 개돼지도 그리 부르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동학농민군으로 들어와 ‘인내천(人乃天)’을 배웠고, 그들 역시 하늘처럼 귀한 존재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들은 기꺼이 죽을 수 있었다. 찰나라고 해도 제대로 사람처럼 살아봤으니….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공주 우금티를 찾아가는 날 내리는 비가 자못 비장하게 느껴진 건, 그 전투를 재연해낸 ‘녹두꽃’의 가슴 먹먹한 비극이 새록새록 떠올라서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차가 공주로 들어설 때 멎었다. 비로 축축해진 공기는 유독 차분하고 조용한 공주의 거리와 어우러지며 처연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곧바로 찾아간 우금티에서 1894년에 있었던 그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당대에는 충청도에서 공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을 테지만, 지금은 터널로 뻥 뚫려 공주로 들고 나가는 차들이 쌩쌩 지나는 길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역사를 기억에 남기려는 흔적으로, 우금티 전적지가 자그마한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널따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오르니 1973년에 세워진 ‘동학혁명 위령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비를 맞은 채 오래도록 외롭게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그 탑. 그래도 누군가 갖다 놓은 붉고 노란 꽃들이 그 무채색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듯하다. 탑에 세워져 있는 당대의 우금티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니 드라마 ‘녹두꽃’에서 봤던 그 처참한 상황은 오히려 순화된 느낌이다. 드라마에서는 세 차례 정도의 전투가 그려지지만, 당시 우금티를 두고 벌인 공방전은 40∼50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결국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증원부대가 투입되면서 단 3일 만에 막대한 희생자를 냈고 그렇게 끝나버렸다는 것. 역사의 기록은 그것이 전투가 아닌 살육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위령탑을 옆으로 지나 작게 난 길로 올라가면 그곳이 바로 우금티다. 지금은 우금티 터널의 위쪽에 있는 확 트인 언덕으로 남아 있어 아주 가끔 지나는 등산객들이 보이는 한산한 곳이다. 이 작은 언덕 아래 그 많은 동학군이 유명을 달리했을 거라는 생각에 새삼 마음이 숙연해진다. 1992년부터 공주에서 열렸던 우금티 예술제는 2006년 터널이 완공되고 이 터널 위 공터에서 진행됐는데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여러 장승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 새겨진 문구들이 재미있다. ‘통일세상’을 꿈꾸는 문구가 들어간 장승에, ‘농민수당’이라 적힌 장승처럼 매년 예술제를 통해 세워지는 장승에는 당대의 공주 시민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수출규제 때문일까. ‘척왜’라 적힌 장승의 문구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125년 전 우금티에서 벌어졌던 저들의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성 없는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한편에는 아마도 예술제에서 당시의 전투를 재현할 때 썼던 것으로 보이는 장태가 보인다. 제아무리 단단히 만들어졌다고 했던들 이 장태로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알을 뚫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학군들의 의지가 더 강철 같았을 테다.
우금티는 소 우(牛)자에 금할 금(禁)이 더해진 이름을 가진 고개로, ‘소를 금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된 건 옛날 이 고개에 도적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가 저문 뒤에는 소를 몰고 고개를 넘어가는 걸 금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 우금티가 왜 동학군의 최후의 전투지가 됐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을 들여다봐야 한다.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해 전주로 넘어왔다가 관군과 화약을 맺고 일단락되는가 싶었던 혁명은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일본군과 대항하기 위해 다시 봉기한 동학군들은 서울 진입을 목표로 세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 중요한 거점이었던 공주를 먼저 장악해야 했던 것. 공주로 들어가는 우금티를 넘는 일은 그래서 동학군들에게는 이 모든 거사의 시작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전투의 대패로 패색이 짙어진 동학군을 전봉준은 해산했고, 결국 그해 12월 배반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돼 처형됐다.
우금티 전투의 아픔은 지금도 공주 곳곳에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공주 금성여고와 문예회관 사잇길을 내려오다 보면 만나게 되는 ‘송장배미’라 새겨진 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본래 그곳은 지금도 연꽃들이 가득한 못으로, 한때는 ‘용못’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큰 가뭄에도 절대 마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는 그 연못이 송장배미로 불리게 된 건 전사한 농민군들의 송장이 논배미에 쌓여 있어서였다고 한다. 너무나 참혹했던 송장배미는 한동안 묵히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종주 모퉁이 가서 송장배미나 지어 먹어라”는 땅 없는 가난한 농부를 놀리는 말이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다. 여기서 종주는 송장배미에서 고마나루(곰나루)로 이어지는 들을 말하는 것이다. 농민들이 이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한 제를 올리기도 했다는 송장배미는 그래서 우금티의 아픔을 지금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우금티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아픈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공주는 그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여러 역사적 사건들의 주 무대가 돼왔다. 금강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고마나루는 그래서 공주를 찾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이다.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지명으로 여기서 ‘고마(固麻)’는 곰의 옛말이다. 즉 ‘곰나루’의 한자명으로 우리가 백제하면 익숙하게 떠올리던 수도 ‘웅진(熊津)’이 바로 그곳이다. 475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두 번째 수도가 됐던 곳. 538년 성왕이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이곳은 삼국시대 마한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곳이었다. 우금티가 공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것처럼, 고마나루는 백제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그래서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러 들어왔을 때 주둔지였고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했다.

어딘가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사실은 공주라는 곳이 역사의 아픔을 유독 많이 품고 있는 이유가 됐다. 그것은 백제시대에서부터 그랬고,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의 끝자락에 우금티에서 벌어졌던 그 절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지금은 너무나 고요해 오히려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을 편안하게 안아주는 그런 곳이지만, 그 고요 속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때의 함성과 절규들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아마도 그 숲에 있던 오래된 나무들은 당대의 그 역사적 현장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지 않을까.
이 아픈 역사를 지난해에 와서야 비로소 법정기념일로 세웠다는 사실은 그 오랜 쓸쓸함을 더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실패한 역사로 치부됐던 동학농민혁명은 이로써 그 오랜 세월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것이 단지 실패로 끝난 건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 그때의 횃불이 있어 우리 시대의 촛불이 가능했다는 걸 우리는 이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정덕현
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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