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혼란은 안정에 대한 갈증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영웅을 만들어내지만, 난세의 광기는 혼란을 잠재우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칫 억울한 죽음을 만들 수도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 반대편이어서 모함을 받거나 복종하지 않는 힘없는 학자, 문필가는 희생양이 되기 쉽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대표적 사례다. 현대를 살아가는 프랑스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나폴레옹이지만, 혁명이라는 혼란이 없었다면 프랑스에 갓 편입된 코르시카의 촌뜨기 초급장교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프랑스 황제가 될 수 있었을지 되새겨 볼 만하다.
반례로 근대 화학의 기틀을 만들어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라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학자가 있다. 1743년 8월 26일에 법률가인 아버지 장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재벌가 딸인 어머니 에밀리 퐁크티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프랑스 상류층의 자제들이 다니던 콜레주 드카트르 나시옹에 입학해 교양과 수사, 고전에 대한 기초를 배우며 소양을 닦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과학에 관심을 끌게 되고 식물학 기초를 배우며 주변의 물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게와 길이 등을 재고 기록으로 남겼다. 25세 때 어머니 유산의 일부를 사용해 ‘세금관리조합’의 조합원이 된 그는 첫해에 10만 프랑의 수입을 얻어 이 돈으로 실험도구와 약품을 구매한다.
그가 살던 18세기에는 과학연구가 제도화돼 있지 않아 개인 비용으로 연구가 이뤄졌다. 그래서 연구를 하려면 필요한 실험도구나 약품을 구매하기 위해 막대한 후원을 받거나 엄청난 개인 자금이 있어야 했다. 실험에 실패해서 파산할 때는 교도소에서 삶을 마쳐야 하는 일도 있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한 비운의 과학자도 많았고 선뜻 과학의 길을 선택하기 힘들었다. 그런 사회적 현실에서 라부아지에는 훌륭한 실험도구들이 가득한 실험실과 어떤 재료든 구매할 수 있는 엄청난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질들의 화학반응을 연구하던 그는 반응 전과 후의 양이 항상 같아야 함을 깨닫는다. 이를 증명하고자 순수하게 정제한 설탕을 이용해 알코올 발효를 했는데 발효 전과 후의 질량 차이가 예상한 오차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갓 짜낸 포도즙을 분석해서 당분의 비율이 25% 정도인 것을 알아낸 후 정량적인 방법으로 포도즙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했다. 포도즙이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변하는 과정에서 질량의 변화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1789년에 발표한 이 최초의 연구결과는 ‘질량보존의 법칙’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됐다.
33개의 원소를 발견하고 다이아몬드를 태우면서까지 화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여한 그를 역사는 가만두지 않았다. 세금관리조합의 일원인 것을 이유 삼아 결국 1794년 5월 8일에 라부아지에를 단두대에 세운다. 화약 개량과 미터법제정 등 여러 분야의 기여도를 강조하며 정상참작을 요구했지만, 공화국은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많은 과학자 중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그의 머리를 치는 데에는 4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드는 데에는 100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시간이 지나 그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이미 천재의 삶은 끝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