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우연으로 배윤주(여·67·사진 오른쪽) 씨와 정창웅(지난해 11월 작고) 씨는 연인이 됐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대학생이 돼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둘은 다시 만났다. 그러고 몇 년의 세월이 지나 버스정류장에서 운명처럼 마주쳤다.
‘날씬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뚱뚱해졌지? 얘도 아저씨 다 됐네.’ 버스정류장에서 창웅 씨를 다시 봤을 때 윤주 씨가 한 생각이다. 그 후 둘은 주유소에서, 성당에서 또다시 마주쳤다.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가 많아졌고 연인으로 발전했다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창웅 씨 어머님이 사주 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둘은 결혼을 허락받기 전 어머님이 다니던 점집을 찾았다. 바람과 달리 궁합이 좋지 않다는 역술가의 말에 둘은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운명을 바꾸기로 했다. 창웅 씨와 궁합이 좋다는 나이로 윤주 씨 생년월일을 맞추기로 한 것. 아니나 다를까, 창웅 씨 어머님은 아들이 결혼하고 싶다는 윤주 씨의 거짓 생년월일을 받아 적어 점집을 찾았다. 점집에선 둘을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창웅 씨 어머님은 결혼을 승낙했다.
창웅 씨는 대가족인 자기 가족들 사이에서 아내가 고생할 것을 걱정해 아내에게 대학원에 다니도록 했다. 윤주 씨가 대학원에 가지 않는 날이라도 “학교 간다고 하고 친정에서 쉬고 오라”던 남편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창웅 씨 집안이 운영하는 회사가 IMF 직전 부도가 났다. 창웅 씨는 도피 생활을 시작했고, 부부는 10년 넘게 별거했다. 윤주 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주말마다 남편이 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을 찾았다.
불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2012년 겨울, 막 60대에 접어든 남편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남편이 치매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부부는 늘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랜 별거 생활 탓인지 함께 붙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윤주 씨는 행복했다.
“치매 초기, 남편은 저만 바라보는 세 살배기와 다름없었어요.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금도 가요무대만 봐요. 남편이 참 좋아했거든요. 티비를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 거요. 참 행복했었어요. 결혼 후 처음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오로지 우리 둘만 재미있게 놀았던 거 같아요. 남편이 치매에 걸리니까 알겠더라고요. 제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요.”
하지만 치매가 악화되면서, 창웅 씨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폭군이 됐다. “엄마마저 잃기 싫다”는 아들들의 요구에 따라 윤주 씨는 남편을 요양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다시 주말 부부가 됐다. 윤주 씨는 새로 지은 빌라를 분양받았다. 남편의 폭력이 좀 줄어들면 다시 집으로 데려와 여생을 함께 보낼 계획도 세웠다. 하루는 남편을 요양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저기가 새로 이사 갈 집”이라고 말해줬다. 당시 단어를 잃어버려 정상적인 대화가 거의 안 되던 창웅 씨가 윤주 씨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창웅 씨는 아내에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병원에서 한 달여를 투병하다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작년 11월이다.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서글펐죠. 그런데 그런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남편과 행복했던 시간만 기억에 남아요. ‘우리 마누라 최고’라던 세 살배기 남편 말만 생각나요. 시월드로 힘들까 봐 대학원 보내며, 친정서 쉬고 오라던 남편 모습만 기억해요. 저에게 마지막으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남편 목소리만 남아 있어요. 남편이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함께한 6년, 제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세 살배기 남편, 그래도 사랑해!” 윤정선 썸랩 에디터
sum-la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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